태그 : 축구
2008/05/15   잊을 수 없는 감독 니폼니쉬 - 1
2008/04/08   윤정환에 대한 이야기 - 9 (마지막) [15]
2008/03/24   윤정환에 대한 이야기 - 8 [4]
잊을 수 없는 감독 니폼니쉬 - 1
미디어다음 스포츠 명예기자
양원석 blokhine@hanmail.net

니폼니쉬라는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0년 월드컵을 앞둔 어느날이다. 당시 일간스포츠에서 1990 월드컵 특집으로 나온 각국의 전력분석에서 카메룬의 대표팀 감독에 '네폼네아치(Nepomniachtchi)'라는 러시아인의 캐리커쳐가 올라와 있었다.

신문은 당시 카메룬의 전력에 대해서 “카메룬 선수들은 '불굴의 투혼'을 가지고 있다"라는 인상적인 평가를 내렸었다. 그 말대로 카메룬은 첫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격침시켰고 그 뒤 루마니아, 콜롬비아를 잇달아 꺾으면서 아프리카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8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때만 하더라도 니폼니쉬 감독은 나에게 있어서 '머나먼 사람' 일뿐이었다. 하지만 1994년 10월 ‘머나먼 사람’은 한국에 오게되었다. 당시 유공(현 부천)의 박성화 감독이 물러나면서 니폼니쉬 감독이 취임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대단한 사람이 오는구나' 하고 단순히 생각하기만 했다.

1995년부터 자주 참여는 안했지만 유공의 서포터스 활동을 하던 나는 점차 니폼니쉬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갔다. 그리고 1996년, 유공은 연고지를 부천으로 확정하고 서울 목동운동장에서 홈 경기를 치뤘다.(당시 부천엔 경기장이 없었다.)

서포터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선수단과 친분을 쌓아 선수단 숙소에 찾아가기도 했었는데 그때 바로 니폼니쉬 감독과 이야기를 할 기획가 생겼다. 통역인 강창석씨와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건 '참 다정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축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편협해져 있었던 축구에 대한 시각을 많이 바꿔주었으며, 또 감독 자신의 축구철학뿐만 아니라 한국이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성적을 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차근차근히 말씀해 주시며 한 축구매니아의 눈높이을 높여준 것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 첫만남이 끝난 뒤 통역인 강창석씨는 이런 말을 했다. "전 감독님의 인품에 반했습니다. 평생 모셔도 될 분이에요". 그 말은 지금도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직접 느낀 것은 1997년 아디다스컵 마지막 경기였다. 당시 부천은 승점 2점만 추가하면 우승이 확정되는 경기였다. 난 그날 대형 부천 깃발을 챙겨 들고 광양으로 내려갔다.
차가 막혀 늦게 들어서니 이미 전반은 0-2로 뒤진채 끝나있었고 전남은 부천을 유린하며 6-0의 대승을 이끌어냈다. 아마 지금까지도 전남이 프로구단과의 경기에서 거둔 최고의 대승이었을 것이다.

광양의 관중들은 신바람이 났지만 내 맘속은 그렇지 못했다.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으로 내려갈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라커룸 안쪽 샤워실 부근에 그냥 서 있었는데 안쪽 문이 열리면서 니폼니쉬 감독이 조용히 나왔다.

담배를 꺼내시며 조용히 불을 붙이던 니폼니쉬는 나에게 어눌한 영어로 "I'm sorry"라는 한마디만 하셨다. 그말로 충분했고 필자의 볼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 조용히 "We team's not fortune"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돌아가는데도 부천 선수들은 화가 나 있었지만 니폼니쉬 감독은 몰려드는 팬들의 사인공세에 웃으면서 하나하나 답해주셨다. 솔직히 그런 상황이라면 어느 누가 그냥 넘어가겠는가.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사인을 해주셨다.

그리고 운이 다했는지 그해 부천은 정규리그 꼴찌를 했다.

이후로도 니폼니쉬 감독에겐 운이 따르지는 않았다. 1998년 아디다스컵에서도 최종 결승엔 진출했지만 울산과의 결승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그쳤다. 정규리그에서도 별로 힘을 쓰지는 못했다.

그리고 니폼니쉬는 조용히 한국땅을 떠났다. 떠나기 전 필자와의 만남에서 니폼니쉬 감독은 "너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있었습니다"라고 떠나는 변을 대신했다. 한국에서의 인상이 어땠느냐를 묻는 필자에게 "좋은 기억들이 많았다. 배우고자 하는 선수와 코치를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라고 필자에게 답을 해 줬다. "또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는지...팬들은 당신이 계속 있길 바란다"는 질문에는 "기회가 된다면 언제나 올 것이다."라고 하며 한국무대를 떠났다.

이후 니포는 J리그의 히로시마 산프레체 감독을 거쳐 중국프로리그에 둥지를 틀었다. 니포가 한국에 인연을 또다시 맺을 기회는 2002 월드컵 감독 선임 문제였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아쉽게 예선에서 탈락한 한국축구는 월드컵 감독으로 '외국인 감독'을 영입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팬들 사이에서는 "한국축구에 경험이 많은 비쇼베츠나 니폼니쉬가 오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특히 니폼니쉬는 카메룬 대표팀을 이끌고 '8강'이라는 성적을 냈기에 더 기대감이 컸을 것이다. 니폼니쉬 자신도 솔직히 욕심이 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축구협회의 '감독 후보자군'에 니폼니쉬는 들어있지 않았다. "니폼니쉬는 분명 실패한 감독이다"라는 이유가 컸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분명 성적면에서 니폼니쉬축구는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1996년 아디다스컵 우승이라는 것 외에는 우승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2 월드컵 감독은 다들 아시다시피 히딩크가 맡았으며 히딩크는 '4강신화'를 만들어냈다. '니폼니쉬가 맡았다면 과연 4강을 만들어 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은 "모른다. 하지만 4강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라 하겠다.

분명 '니포축구'라는 부천의 축구는 성적면에선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 '니포축구'는 1990년대 후반에 한국축구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사실이다.

'니포시대'의 미드필더진은 당시 전문가들조차 탄성을 자아낼 만큼 탄탄함을 가지고 있었다. "미드필더만 놓고 보면 대표팀을 능가한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윤정환-윤정춘-조셉-김기동으로 이어지는 부천의 미드필드진이 이끌어내는 경기들은 지금 다시 보더라도 경탄이 나온다.

물론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이들이 엮어내는 플레이에 팬들은 감탄했으며, 심지어 타 팀의 서포터들조차도 "승부는 우리가 이겼지만, 우리도 '뻥축구'가 아닌 부천같은 플레이를 했으면 좋겠다"고 경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부천의 '목동시대'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의 4년간이다. 이 시기를 놓고 필자는 '부천의 최고 황금시대'라 부르기에 주저치 않는다. 물론 부천은 1989년에 정규리그 우승을 하며 팀 최고의 성적을 올렸지만 팬과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시기는 분명 '목동시대'이다.(개인적으로는 1996년의 경기들을 부천의 '베스트트랙'으로 생각한다)

이 시기를 지킨 니폼니쉬의 축구에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팬들도 많다. "이것이 '재미있는' 축구다"라는 것을 보여준 니폼니쉬 감독때의 부천팀을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필자는 오래전 하이텔 축구동호회에 니폼니쉬 감독의 카리스마를 일컬어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명명했던 적이 있다. 강인한 이미지가 아닌 부드럽게, 그러나 어느샌가 그의 인품에 녹아들어 자연스레 팬이 되게 만든 그런 거부할 수 없는 이미지가 필자에게 남은 니폼니쉬의 이미지이다.

지금은 서포터간의 골이 깊어져 상대팀 감독을 비난하는 경우가 잦지만, 아마 '팀을 옮기더라도 비난하지 못할 감독'을 꼽으라면 니폼니쉬 감독은 분명 그 첫손에 꼽힐 것 같다.

2000년이던가? 중국 티탄저우보의 송청운 기자가 니폼니쉬 감독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때의 한국팬들이 나에게 보여준 애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단다. 니폼니쉬 본인은 아직도 '목동시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천이 지금 떨어지는 성적을 내는 가운데에서 니폼니쉬를 다시 불러오길 바라는 팬들이 적지 않다. 필자도 그 중 한명임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만약 니폼니쉬가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니폼니쉬의 '목동시대'를 기억하는 팬들은 많을 것이다.

니폼니쉬는 히딩크처럼 '강렬하고 분명한 기억'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기억하는 팬들은 니폼니쉬를 '잊을 수 없는 감독'으로 꼽을 것이다.

"나는 신체적 문제 때문에 선수생활을 일찍 접었습니다. 그래서 감독 생활을 일찍 했지만 그점에 있어서 아쉬운점은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던 축구장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선수로서 기쁨은 포기했지만, 감독으로서의 기쁨을 즐기고 있습니다. 좋은 선수를 만나서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것.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합니다."

------------------------------------------------------
아마도 2003년쯤인가에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기사를 쓴 뒤 많은 목동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메일이 쇄도했다.

그분들은 니폼니쉬에 대한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나의 스승의 날에 어울리는 단 한분의 축구감독.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발레리 네폼네아치 당신 뿐입니다.
by 홍차도둑 | 2008/05/15 00:38 | 축구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윤정환에 대한 이야기 - 9 (마지막)

15. 4강의 영광, 그러나 윤정환은 없었다.

드디어 맞이한 월드컵 본선.
그러나 윤정환의 자리는 없었다.


폴란드전 2-0, 미국전 1-1, 포루투칼전 1-0 이라는 예선 내내 한국은 미드필드에서 엄청난 힘싸움을 벌이는 접전이었다. 이 상황에서 윤정환이 뛸 자리는 없었다. 16강 이탈리아전은 이건 뭐 전쟁이나 다름없던 상황이고, 8강 스페인전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아쉬워하는 4강 독일전. 많은 분들이 '0-1상황에서 윤정환을 투입해 보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경기로 꼽는다.
이미 윤정환은 1999년 3월28일에 열린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한건'을 만든 전과가 있기 대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0-0으로 경기가 끝나지 않을까 싶은 막판에 윤정환의 스루패스를 받은 최성용이 측면 돌파뒤 올린 크로스를 김도훈이 논스톱 슈팅으로마무리 지어 1-0으로 승리. 지금까지 브라질과의 대표팀 대결에서 유일한 승리를 거둔 전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스루패스 한방을 보고 많은 팬들은 '어떻게 그 순간 최성용의 침투를 보고 찔러줄 생각을 했을까? 역시 윤정환의 시야는 최고다' 하고 김도훈의 멋진 슛과 함께 칭찬하던 장면이었다.

2002년 4강전에서도 독일 선수들의 허를 찌르는 윤정환의 패스가 있었다면 경기내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은 매우 매력적이다.
그 한번의 패스로 인해 칸이 뚫리고 그렇게 해서 최소한 승부차기 까지 갔더라면, 아니 연장전에서도 기운빠진 독일을 밀어붙혀 '대한민국 월드컵 결승 진출'이라는 대사건도 벌이지 않았을까? 어차피 0-1로 지고 있는 상황이니 어차피 질 바에야 모험 한번 해 보는 것도 좋았을텐데 말이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가정을 인정치 않는다. 결승전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히딩크도 아마 그 상황에서의 윤정환의 투입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아쉬운 순간이고 '그 자리에 윤정환이라면?' 이라는 매력적인 가설은 있지만 실현되지 못한...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3-4위전의 언저리 뉴스는 윤정환의 출전여부였다. 이때 윤정환 외에도 현영민도 출전을 하느냐 마느냐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터키전에서...한국은 교체선수를 다 썼다. 79분...후반 32분 설기현과 최태욱이 교체되는 순간. 한국은 교체선수를 다 썼다. 더불어 윤정환의 월드컵무대는 끝났다. 피치에 한번도 못올라본 대기선수로서 말이다.
한 언론사에서는 이 순간 윤정환의 부인이 대성통곡했다고 적었던 언저리뉴스가 기억난다.

아마 당사자 윤정환의 속은 더 끓었을 것이다. 아마도 엄청난 슬픔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윤정환은 생각보다 여린선수다. 그 가슴아픔은 아마도 평생에 갈 것 같다.


한국의 4강진출의 화려함속에 있는 그림자중 하나는 윤정환이었다.



16. 월드컵이후

윤정환은 1973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72년생이다(나와 동갑이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뒤엔 이미 우리나이로 서른줄을 넘은 상황이다.
그는 결국 K리로 다시 돌아왔다. 성남 일화에서 그를 부른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아는 지인들은 "글쎄? 성남에서 윤정환이 뛸 자리는 있을까?"
혹자는 '레알 수원'이라 하지만 내가 볼 때 성남이 갖춘 '초대 피스컵'을 위한 진영은 대단했다. 그때 성남이 여러 대회를 출전하기 위해 갖춘 라인업은 그야말로 유럽의 빅클럽들이 챔피언스 리그 등을 노리기 위해 적용하고 있는 '1진 라인업 3개 만들기'와 비슷한 시도였다.
많은 돈을 받으면서 K리그로 복귀했지만 성남의 팀 플레이 스타일은 윤정환과 잘 맞지 않았고 결국 윤정환은 팀에서 많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윤정환은 전북으로 팀을 옮겼다.
옮기기 전 만날 기회가 있어서 대화하니 윤정환은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날 기용해주는 감독에게 가야지..."
언제나 같은 톤이었지만 뒤의 뉘앙스가 슬프게 다가왔다.

전북에 가서는 부천시절처럼 뛰어난 활약이라던가 팀의 정비에 앞서지는 못했다. 조윤환감독이 니폼니쉬하고 같이 있던 사이였더라 해도 선수구성이 비슷하다 해도 윤정환하고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전북의 저울추는 김형범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윤정환은 점차 뛰는 기회가 줄어들엇고, 결국은 일본의 사간 도스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뛸 수 있는 팀을 원했다. 그러기에 전북으로 이적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의 최종 종착지는 일본의 사간 도스 팀이 되었다.


17. 은퇴

결국 지난달 윤정환은 은퇴했다.
36세의 은퇴, 적게 뛴 것은 아니다. 나이로 볼땐 분명 한계이긴 했다.
윤정환은 이미 선수시절에 많은 부상을 당했고, 그 때문에 많은 기회를 놓친 선수이기도 했다.

윤정환의 에이전트인 이영중씨하고 2001년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전지훈련중이던 때에 만났는데 그날 FC발바이크와의 연습 경기가 있어서 같은 차량을 타고 이동중에 이야기가 있었다.(요거 하고 며칠 뒤에 체코와의 경기에서 0-5로 패했다.)
이때 이영중씨는 "부상만 아니었다면..."하고 한숨쉬던 것이 기억난다. 다른 좋은 팀과의 입단계획도 잡았지만 메디컬 테스트에서 다 걸렸다는 것이다. 도무지 선수로서 뛸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이날 경기는 장대비가 내렸는데 경기 내내 비 쫄딱맞으면서 응원했더니만 네덜란드 사람들이 기가막혀 하더라...-ㅅ-
대표팀 유니폼 입고 다니니 기념촬영도 많이 했다. 그렇게 작은 도시에 한 나라의 대표팀이 오는 것도 큰 사건인데 저 멀리에서 경기보러 왔다고 하니 더 놀라더라는 거, 거기다 경기내내 장대비가 내렸는데 그거 통으로 맞고 응원하니 교포분들도 놀라서...결국 한 교포분의 성의를 받아들여 아인트호벤으로 다시 이동해서 그분 집에서 1박했다.
그리고 그날 경기는 전반종료쯤 해서 1-0으로 안정환의 골로 한국 승리.
그런데 그 골이 어느정도냐면...얼마전 보여준 그 페널티 에리어 밖에서의 터닝 중거리포...그거를 하프라인쯤에서 해버린 것이었다. 네덜란드 관중들도 기립박수 칠 정도였다)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천재로 꼽는 김병수(현 포항2군 코치)도 부상치료를 제대로 못한 채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윤정환도 비슷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린 선수들을 너무 혹사시킨다. 요즘에서야 관리가 들어가긴 했지만...그래도 너무 아쉬운 면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그것만으로도 책이 여러권 나올테니...생략하자)

그러나 부상만으로 모든 원인을 돌릴수는 없다.

그렇다고 윤정환이 모자란 선수는 아니었다.
아마 윤정환의 불운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일 거고, 대한민국의 축구팀이 많은 개성과 다양성을 가지지 못해 윤정환이라는 선수를 담기 힘든 그릇이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그가 보여준 개성의 발현과 그것으로 인해 나온 부천의 '목동시대'의 경기들은 그 경기를 본 사람들은 아마도 영원히 '목동시대'를 잊지못할 것이다.
윤정환은 그때까지 한국축구의 지리함을 한순간이나마 깨어버린 선수이기 때문이다.



18. 에필로그
애초에 몇개로 써보자고 한 글이 이렇게 길어질줄은 몰랐다.
쓰다보니 아주 작정하고 옛날 이야기도 많이 넣어보자 싶어서 하다보니 윤정환 본인보다는 '목동시대'의 부천 이야기도 많이 들어가게 되었다.

윤정환이 은퇴 하면서 사간도스에서 맡은 일...
아마 그거 때문에 가족들 많이 울었을 것이다.
윤정환이나 윤정환 부인이나 둘다 똑같은게 마음이 아주 여린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이다. 분명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들을 아마 자신의 입장에서 되새김질 했을 것이다.


어쨌건, 윤정환이라는 선수 때문에 흥분하고 재미있고 그랬던 세월이 자그만치 14년이다. 거의 한 세대동안이다.
그의 은퇴를 보면서 하나의 시대가 갔음을 다시금 느끼는데다가...
마지막 월드컵과 그 이후를 어떻게 써야 할까로 많이 갈등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쓰지 못했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할 부분이 생길것이다. 그때 그 이야기들을 끼어넣어야겠지 하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긴 글 기다려 주시고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by 홍차도둑 | 2008/04/08 16:29 | 축구이야기 | 트랙백 | 덧글(15)
윤정환에 대한 이야기 - 8

13. 2002 A팀에 합류하다

윤정환은 국가대표 A팀 경험이 많지 않은 편에 속한다. 1996년 올림픽에서 그는 마에스트로였고 그의 활약에 따라 한국 올림픽 대표팀의 성적은 좌우되었다. 그리고 1948년 런던 올림픽 이후 숙원의 올림픽 통산 2승째가 그의 발끝에서 나온다.

1996년 올림픽 가나와의 경기에서 그는 중원의 지휘자로 나서 한국팀의 공격을 주도한 끝에 황선홍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당당히 한국축구의 올림픽에서의 2승째를 신고하는 주역이 된다.

하지만 대표팀에서 그는 발탁되지 않았다. 차범근 감독은 수비를 먼저 탄탄히 하는 전술을 중시했기에 플레이메이커도 전통적인 수비 우선의 멤버를 중심으로 짰다. 심지어는 공격지휘자 없이 공격을 이끄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런 상황에서 윤정환의 입지는 없었다.
월드컵을 앞두고 차범근 감독이 여러 선수들을 불러서 테스트를 할 때 윤정환도 포함되었지만 본선에 나가지는 못했다. 차범근 감독하고는 여러모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윤정환은 1998월드컵이 끝난 뒤 1998 아시안 게임에 대표로 선발된다. '플레이메이커를 중시하겠다'는 허정무 감독의 말대로 합류한 윤정환은 아시안게임에서 골도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지만 결국 결승에 오르지 못한다. 한국은 태국과의 경기에서 연장전에서 태국의 기습적인 중거리포를 허용하며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이때의 감상을 물어보니 윤정환의 답은 "거기서 슛을 때릴줄은 몰랐지. 완전히 당한거였어"라고 회상했다)

그 뒤로 무려 4년간 윤정환은 대표팀과 인연이 많이 없었다. 몇차례의 경기에 뽑히기도 했고, 경기를 뛰면서 활약하긴 했지만. 히딩크가 대표팀 사령탑을 잡은 이후  대표팀은 '히딩크의 황태자' 고종수가 중원의 지휘자로 나섰다. 그리고 이때가 고종수의 최전성기이기도 했던 때다.
고종수와 윤정환 누가 더 낫냐? 라는 명제에 대해 답을 내리긴 힘들다. 양쪽 다 강점이 있고 단점이 있는데 서로간에 겹쳐지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
윤정환과 고종수는 언론에서 흔히 '멋진 패스메이커'로 불리지만 글쎄? 내가 볼 땐 고종수를 패스메이커로 꼽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의 패스는 훌륭하긴 하지만 윤정환과는 약간 다르다. 고종수는 기본적으로 슈팅메이커이며 패스가 부차적인 반면 윤정환은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굳이 비교한다면 농구에서 마이클 조던과 어빙 '매직' 존슨과의 비교라고나 할까?
마이클 조던은 기본적으로 슈팅 가드고 득점기계였지만 패스도 나름 뛰어난 면이 있던 선수다. 매직 존슨은 뛰어난 포인트 가드고 어시스터라지만 때론 팀의 주득점원이기도 했다.(그의 등번호 32는 그가 한 경기에서 기록한 최다 어시스트 기록이다. NCAA에서 한 경기에서 32개의 어시스트를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은 분명 슈팅 가드로서 득점만 해댄것도 아니고 포인트 가드로서 킬패스만 열심히 한 선수들 아니다. 자기의 '부차적'인 임무에서도 뛰어난 공간인지능력, 경기를 보는 시야. 그리고 그 때 움직이는 결단력이 있던 선수들이다. 윤정환과 고종수도 그와 같다. 다만 본인이 즐겨하는 플레이스타일이 같지는 않고 그 과정에서 고종수를 전통적인 '플레에미커'로 분류하긴 힘들다는 것이다. 윤정환은 그나마 전통적인 의미의 '플레이메이커'도 소화한 선수였지만 말이다.
(엄밀한 의미로 고종수가 수원에서 '플레이메이커'를 소화한 적은 거의 없다.)

여하튼 히딩크는 초기에 윤정환을 부르지 않는다. 그 흔한 테스트로서도 말이다.

합류한 것은 2002년께쯤 되서야했다. 고종수의 부상으로 월드컵에 뛰지 못했던것이 확정되었던 즈음이었을 거다.
어찌 보면 고종수의 대타였겠지만 히딩크로서는 다른 선택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윤정환은 평가전에서 크게 빛난 것은 2002년 5월 16일이었다.

14. 부산의 5.16 대첩

2002년 5월 16일 나는 부산에 있었다.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

당시 스코틀랜드는 월드컵 예선 탈락 뒤 베르티 포크츠 감독을 영입하고 전열을 다시 정비해서 EURO2004에 도전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하던 때였다.
스코틀랜드가 어디던가?
비록 월드컵에는 1998년을 끝으로 이후 등장하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 잉글랜드의 최 정상시절 잉글랜드를 번번히 꺾으면서 견제세력으로 존재했고 글래스고의 셀틱, 레인저스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만찮은 성적을 낸 팀들이다.
월드컵 본선에 못오르더라도 플레이오프, 또는 조 예선에서 강팀들을 긴장에 빠뜨리는 또다른 강팀이 아니던가

이미 잉글랜드를 상대로 박지성의 골로 1:1로 비겼고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차두리의 대표팀 첫 골로 2:0으로 이긴 한국으로선 또다시 제대로 된 팀을 상대로 하는 마지막 급피치를 올리는 평가전이었다.

이날 스타는 안정환이었다.
이천수가 골키퍼를 제끼는 선제골을 넣더니만 안정환의 두골, 거기다 마지막 골은 윤정환의 패스를 받아 완전한 골키퍼와의 1:1 상황에서 골키퍼 만세 부르게 만드는 칩샷은 한국축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중 하나로 꼽아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당시 딴지일보의 기사를 다시한번 옮겨보자.
(원문은 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109&article_id=1143    내가 좋아하는 기자중 하나였던 펜더 기자의 글이다. 솔직히 초반부는 정말 동감이 간다. 특히 '고삐리들 삥 뜯던 양아치에서 대부의 알 파치노로 변신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부분은 대공감이다)
-----------------------
어즈버 태평 연월이니 아아 지난주만 같아라...

그렇다. 지난 주 한국과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 보믄서 본 우원 졸라 충격 먹었다. 평소 한국축구를 살리는 길은 한국 축구 16강에 똑 떨어져 정신 챙기구 나서 그 말 많고 탈 많은 축구협회 기술위원회를 다 짤라 버려야 한단 신념으로 살아온 펜더...

이번 월드컵에서 1승만 건지면 졸라 왕재수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나 보아라!! 우리 오대영 감독 아니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를 고삐리들 삥 뜯던 양아치에서 대부의 알 파치노로 변신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보았는가?? 맨날 문전에서 서로 슛 안할려고 빙빙 패스 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기회만 닿으면 날려버리는 그 후련한 슛!! 오 저것이 말로만 듣던 2:1 패스와 스루패스였던가?? 아 저것이 독일 애들이 잘하는 그 공간 패스였던가??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미드필더부터 저렇게 압박축구를 해냈던가?? 저게 말로만 듣던 오렌지 군단의 트레이드 마크. 압.박.축.구 였단 말인가. 압박이라면 군바리 시절 보았던 압박붕대 밖에 보지 못했던 펜더, 테레비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던 것이었다.

오... 신이시여 이게 정녕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었단 말입니까??

이것을 두고 우리는 괄목상대라 하는 것일 것이다. 씨바 불현듯 1년전 엠비씨 <100분 노가리>에 나와 히딩크 나쁜놈이라 성토하던 그 기술위원들 얼굴이 떠올랐다. 씨바 쉐이들...
(주:2001년 12월 1일 조추첨이 끝난뒤 KBS에 출연해서 나도 기술위원들에게 한마디 햇었다. '감독이 팀 만드는데 2년이 걸리는게 보통인데 지금와서 뭔 감독교체냐?' 하고, 그 출연한뒤 바로 서울 올라와서 영풍문고 갔더니만 알아보는 사람들 많아서 그때 한달넘게 취재 빼놓고 도망다녔다...다들 하는 말이 기술위원들 모습 갑갑했는데 속시원히 말해줘서 고맙다면서, '우리나라 16강 갈까요?' 하고 물어들 보시는덴...정말 난감했다.)

글타, 우리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실력뿐만 아니라 골 세레머니도 졸라 향상 되었다. 외국 물도 먹고, 외국 감독도 들어와 그런지 촌스럽게 그라운드에 몸을 던져 비비고 싸던 촌티를 싹 벗고, 기도를 하며 겸손하게 자신의 골을 신의 은총이라 표현하는 모습. 자신의 반지에 입맞추며 세련되게 마무리하는 아내사랑의 모습.가볍게 한팔 올려 여유를 부리는 자세들.

아... 진정 한국 축구는 후까시 잡는 것도 세련되어진 것이었다
(후략)
----------------------------------
아마도 이날 경기는 2002년 한국이 치룬 경기 중 경기내용만으로 보면 '상대팀을 완벽하게 잡아먹은 경기' 였다. 스코틀랜드는 한국의 빠른 패스를 쫒아다니다 못해 지쳐버렸으며 그 틈을 탄 두 정환(안정환 윤정환)의 골은 스코틀랜드를 아주 격침도 모잘라서 팀 자체를 인수분해시켜버렸다.
안정환의 피날레 골은 스코틀랜드 선수들도 완전히 '감상'의 경지에 빠져버렸더만...^^

그 여파로 포크츠 감독은 별 성적도 못내고 스코틀랜드 감독을 사임한다. 스코틀랜드 언론들은 대놓고 '이건 변명할수도 없는 완패다' 라고 시인했으며 당시 붉은악마를 취재하러 나온 프랑스 풋볼 기자에게도 물어보니 대놓고 "판타스틱!"을 이란다. 이날의 후반전의 주역이라 할수 있는 앙과 융을 연발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내 생애에서 본 한국 대표팀 경기중 정말 '완벽하게 상대를 잡아먹은 경기'를 꼽으라면 이 경기 꼽겠다.

이날 윤정환이 보여준 경기 운영은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윤정환의 한계점을 또다시 보여준 경기이기도 했다.
안정환의 마지막 골을 만든 그 멋진 패스와 교체되자마자 2분만에 골을 기록한 것은 분명 화려한 기록이지만...그 이면엔 다른 윤정환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윤정환의 이날 활역의 밑바침은 전반전에 이미 한국의 강한 압박으로 인해 체력이 떨어진 스코틀랜드의 도움이었다.

이미 전반전에 엄청난 압박으로 스코틀랜드는 이미 지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딩크는 상대를 격침시키기 위한 카드로 뽑은 것이 윤정환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측면에서 자기에게 흘려준 패스를 곧바로 슈팅으로 연결시켜 3:0을 만드는 장면부터 시작하더니만 중원을 여유있게 뛰어다니면서 수비와 공격을 연결시켜갔다. 윤정환 본인도 상당히 빠른 선수다. 거기다 패스도 잘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천수라는 발빠른 선수도 모잘라 히딩크는 윤정환의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한 돌격탱크로 차두리를 투입한다.
이런 상황에서 윤정환은 자신의 패스메이킹과 빠른 이동, 여러 무부먼트를 마음껏 떨쳤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점점 가라앉아갔다. 스코트 도비의 만회골로 3:1이 되었지만 이미 스코틀랜드 선수들은 빠른 선수들을 막아내느라 지친 것도 모잘라 파김치가 되어버린 상황. 이미 수비수들은 한국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못쫒아가게 되었을 때 스코틀랜드를 안락사시키는 안정환의 그 골을 어시스트한다. 윤정환으로선 25분간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최고의 활약이었다.

현장에 있던 붉은악마들은 대놓고 "제길! 저 웬수들이 해 냈어요!"하고 울먹였고 나도 "담달에 여기서 일 터트리겠다. 나 이제 장담한다 우리나라 16강 간다!"라며 좋아 죽으면서 옆의 붉은악마 후배들을 얼싸안았던 때다.

그때는 그 흥에 겨워 몰랐지만 이 경기는 윤정환의 빛과 그림자를 그대로 보여준 경기였던 것이다.
초반은 몰라도 상대의 압박이 조금이라도 약할 때 윤정환의 빛은 커지지만 반대로 프로경기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활약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

이점은 윤정환에게 있어 양날의 검이 되어 월드컵 본선을 맞게 된다.

by 홍차도둑 | 2008/03/24 12:16 | 축구이야기 | 트랙백 | 덧글(4)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