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는 무를 사랑하는게 아니었습니다
에 른밸님께서 저의 예상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의 주장은...
[이번 유럽2연전의 중심은 '지지 않는 경기'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피해를 보는 경기'를 맘대로 할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였습니다 ^^;;;
이 부분에 대한 차이를 조금 설명하자면...
지지않는 경기하고 '최소한의 피해를 보는 경기'하고는 좀 다릅니다. 최소한의 피해를 보는 것이란 경기 결과로 나오는 '최악의 경우라도 적은 점수차의 패배'일 뿐 아니라 세르비아전에서 보여준 '실점을 하더라도 우왕좌왕 무너지지 않고 빨리 정비해서 정상적인 경기를 치뤄가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 경기 중에도 반격의 기회가 생기지요.
이러한 부분은 1990년대의 월드컵을 보면 한탄스럽게 나옵니다.
특히 1994년 월드컵에서 독일과의 경기를 김호감독은 이렇게 자평했었습니다.
"흔들리는 팀을 빨리 추스렸다면 경기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골키퍼이자 주장인 선수를 교체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더 빨리 그 모험을 시도했어야 했다"라고 경기 직후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결과는 2-3
'따라는 갔지만...투혼은 있었지만 결국은 졌습니다.
전반 중반에 수비가 여지없이 무너진 그 부분에서 승부가 갈렸습니다.
그때 만약 이번 유럽2연전처럼 빠른 수습이 있었다면 경기 자체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게 고쳐지기까지 15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 15년...적은 세월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는 하나의 씨를 뿌린 사람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닌 필연. 그것은 바로 차범근이라는 한 영웅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그 이후 차범근 감독이 연 '어린이축구교실'이 연지 약 18년이 지난게 지금입니다.
그때 시작한 어린이들이 이제 20대 후반이고 더 정비가 된 환경에서 시스템의 도움을 받은 1세대가 바로 지금의 20대 중반과 초반의 선수들입니다.
이전에 언론에서 '희망적인 시나리오'를 열심히 설파했습니다.
'이러면 16강에 갈 수 있다!', '이렇게이렇게 해라!' 그러나 실전에서 가면 연습때 여러 강호(?)들을 상대로 보여준 한국팀의 여러 뛰어난 경기력은 본선에가면 사그러들었고 언론에서 말한 시나리오를 제대로 수행하는것은 '전후반 시작하자마자 약 15분 정도에 그쳤습니다' 아니 대놓고 1990년 월드컵의 첫번째 경기에선 대놓고 '우린 무승부로 가겠다'고 설쳐댔지만 나온 것은 전후반 통털어 70여차례가 넘는 패스미스에 의한 인터셉트...에 상대방에게 농락당하면서 끝나버렸죠.
(쓰벌 그 경기 지금도 생각하면 이빨 갈립니다. 중간고사 때 중간고사 말아먹을 각오하면서 그것도 고3이 말이죠...시험공부 한답시고 밤새면서 봐 댔는데 쓰벌, 아주 그냥 주눅들어서 완전 몸이 얼어붙은채로 말이죠...뭐하자는 건지...하는 생각으로 봤습니다. 당연히 시험은 죽쒔고 뜨벌...)
그런데 이젠 '실제로 할수 있는'선수들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들이 놀려대는 '이기지 못하지만 지지는 않는 근성무의 한국축구'로 보는 선수들입니다.
뭐 이전엔 이기면 화끈히 이겼을까요? 그러기에 이러한 무재배가 열받는 것일까요?
글쎄요...
전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한국은 의외로 약팀을 '캐 바른'예는 많지 않습니다. 이전 1968년 올림픽 진출을 놓고 일본과의 경쟁에서 탈락한 것은 득실차였습니다. '약체' 필리핀을 발라버리지 못한 것 때문에 동률인데 득실차에서 밀렸지요. 그리고 일본은 올림픽 동메달을 따버렸습니다.
(다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뉘앙스를 풍기더군요 '우리가 올라갔어도 그정도 성적은 냈을 것임!' 하고 말이죠...천만의 말씀입니다. 일본을 이기고 올라갔더라도 동메달 못땄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8강도 가기 버거웠겠지요. 이 부분은 언제 다른 예로 글 하나 쓰겠습니다.)
사실 한국이 아시아 최강자로서의 위치를 누린 것은 이전에도 짧았고 지금도 보건데 길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다만 아시아지역 권 내에서의 강팀들과는 수많은 명승부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건 부인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국을 '아시아의 강호'로 당당히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전의 선수들은 아시아권에선 어떨지 몰라도 세계무대로 가면 늘 그랬죠. 언제나 1회전 탈락이요 상대방의 1승 지목 타켓. 누구 말마따나 '승점 자판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옛날 PC통신 시절 축구동호회에선 두가지의 블랙유머가 있었습니다.
'월드컵 및 올림픽 때에 일어나는 일반화된 현상'
강팀을 만나서 본선진출->언제나 약체를 잡고 어떤팀은 비기고 어떤팀은 승부를 포기한다는 시나리오 언제나 1승1무또는 3무->이를 위한 수비력 보강 및 원샷원킬의 공격력 확보->평가전에서의 여러 승리에 기뻐 날뜀->정작 본선에선 저조->대회 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의 무한반복이라는 것.
그기로 경기에서의 '한국팀 월드컵에서의 패배의 공식'
초반 10분 무지 잘함(아 이거 뭔가 될거 같다)->15분쯤부터 오버페이스 또는 빈 틈에 말려서 골 헌납->이후 두갈래 길 상대가 그대로 흔들기만 하고 끝나던가. 아님 그 흔들림이 빈틈을 찾아 추가득점->25-30분이후 정신차린 한국이 약 10분간 신나게 밀어붙임->35분~40분경 역습 당해 골 헌납 또는 위기상황 자초->전반종료. 후반 15분까지 엄청 몰아붙임 이 경우 만회골을 터트리기도 함->20분 무렵 오버페이스및 빈틈 보여서 추가골 헌납->25-28분경부터 신나게 몰아붙임. 그러나 약 10분 정도->나머지 시간동안 상대방은 역습 몇번 하던가 아님 그냥잠그기로 경기 끝남.
거의 틀리지 않는 공식이었지요...알면서도 이렇게 할수 밖에 없는 것이 이전의 선배님들이었고 이게 한계였습니다.
몇몇 시대를 뛰어넘는 선수들 외에는 말이지요...
이 상황에서 최고의 시나리오는 어떻하던 선제골을 넣던가 한골만 실점 한 상황에서 밀어붙일 때 동점골 넣어서 쫒아간뒤 종료되는'무승부'외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러한 체질로 보낸게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의 한국축구입니다.
사실 전 감독으로서의 차범근 감독을 낮게 봅니다. 감독으로서 팀에 대한 여러 부분은 허정무 보다는 더 아래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을 놓고 평할 때. 이제는, 정확히는 2008년 이후부터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영웅' 이라고 감히 말합니다.(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지금도 좋지 않지만요 ^^)
차범근이라는 축구영웅의 업적중 가장 위대한 것은 분데스리가에서의 영웅적인 기록과 활약이 아닙니다. 감독으로서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던가 리그 우승이 아닙니다.
한국축구의 근본을 뿌리채 바꿔놓은 '차범근축구교실'
이것이 차범근의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차범근 감독이 선수시절, 그리고 1990년까지의 느꼈던 여러 점을 정말 개선코자 1980년대 초반부터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나 여러 경로로 알리고 했던 것이 '유소년 축구교실'이었습니다.
한자에서 세대를 일컫는 세(世) 자는 30의 변형이라 하더군요, 30년을 지나서 하나의 세대가 바뀐다는 것이죠.
그러나 가만히 있는다고 바뀌지는 않습니다. 차범근이라는 한국의 축구영웅은 정말 자기가 생각한 뒤 30년뒤의 꿈을 이뤄내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감독으로서는 더 나쁜 평을 차범근은 받을수 있습니다(반대로 좋은 평을 받는 명감독이 될수도 있죠).
그렇지만 차범근 축구교실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선수들이 길러졌습니다.
종목은 다르지만 제 주변에서 일어난 실제 예가 있습니다. 제 후배중 한명은 농구를 아주 잘합니다. 거의 선수 수준이었죠 장난 아니었습니다. 하이텔 농구동호회 초기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이텔 농구동호회에 우연히 인천 송도고등학교의 실제 농구 선수가 가입을 했기에 송도체육관에서 경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그 후배를 보고 송도고등학교 감독이 실제로 송도고등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었습니다. 네...송도고등학교...농구쪽의 명문이지요. 그런데 그 후배는 송도고에 안갔습니다. 선수들이 얼차려 받는거 보고 "왜 맞아가면서 좋아하는 농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면서 안가고 말았습니다. 이게 199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이게 바뀌어진게 바로 1990년대 초반부터의 축구였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걸 하다가 결국 이놈의 '얼차려'로 축구를 싫어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축구교실의 1세대급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 1990년대 중 후반 이후부터 프로팀들이 유소년 클럽들을 창설하고 그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들을 속속 만들어 댑니다. 전북의 경우 최만희 감독님이 계실 때 분데스리가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코치도 데려오고 그것도 모잘라 폐교 하나 인수해서 실제 '축구사관학교' 만들려고 했던 시도도 있었습니다.
당시 우연한 자리에서 최만희 감독님과 이야기를 했을 때 최만희 감독님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히사더군요.
이 선수들 중 재능있는 선수들을 정말 키우고 싶은데 시스템 만드는게 쉽지 않다면서 자기가 전북 감독으로 있을 때 정말 꼭 정착시키고 싶은 것 중 하나가 그 폐교를 잘 이용해서 어린 선수들 키우는 시스템 만드는 것이라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이게 발전해서 지금 전북의 팜 시스템이 되었는지는 아쉽게도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1990년대 중 후반에 이러한 시스템이 갖춰진 곳에 들어간 축구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이제 19세 이상의 대표팀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어린 선수들도 경기력만 따지자면 이미 성인 대표팀 수준을 능가할 정도의 약삭빠른 플레이들이 나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은 현재 바둑에서는 세계 최강국이라 부릅니다. 이 시발점은 보통 1988년 시작된 응창기배에서의 조훈현 9단의 우승부터라고 합니다. 이후 서봉수 이창호 등의 기사들이 우승했고 특히 이창호의 경우는 뭐 국제기전 싹쓸이를 하는 등 난리가 났죠.
바로 이 이창호가 한국 바둑사관학교의 1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훈현 9단의 직속제자였지요. 이후 여러 '내제자' 내지는 '바둑도장'이 생깁니다. 여기서 나온 기사들이 바로 한국바둑의 중추를 이뤄내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경우 쇼와 시절의 두 명인인 세고에 겐사쿠(조훈현 9단의 스승입니다)와 기타니 미노루(조치훈9단이 이 문하생군단[네 정말로 군단급입니다. 문하생들 다 모으면 그들의 단수가 200단은 넘어갈만한...] 막내뻘이지요) 두 사람이 만들어 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그 둘의 문하생들이 이후 몇십년간을 쓸어버리다시피 했죠.
그리고 한국바둑이 정상급에 올라간 것은 당시 최정상을 차지한 조훈현이라는 거목이 분전한 이후 그 무렵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여러 프로들이 영재들을 키워낸 '바둑도장'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때 이창호를 필두로 한 어린 후학들의 바둑을 보고 선배들은 경악해 버렸습니다.
"아니 무슨 10대가...어린 바둑이 아닌 60대의 원숙한 바둑을 둔단 말인가?"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젊다고 패기있게 나가고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한두차례의 펀치교환이 끝나고 크게 싸움 안벌여도 되겠다 싶으면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스타일. 형태에 구애받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치열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더 지독한 치열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전에 자신들이 한 10년 20년을 쌓아야만 할수 있었던 여러 가지들이 이미 10대들이 능수능란하게 구사합니다. 더불어 더 깊은 수읽기, 그리고 연구욕심...이미 이전에 일가를 이루고 도전자 또는 몇개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몇년전의 거장들'은 이미 상대가 안되기 시작하고 최전선에서 하나둘씩 철수해야 했습니다. 과거의 명성만을 남긴 채 그들의 선전은 지금은 화제가 되지만 정상을 다투기엔 이미 경쟁전선에서 탈락해 버린 상황인 겁니다.
자...위의 몇몇 말이 축구와 일치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청소년들이 여러 대회에서 보여준 원숙한 몸놀림은 바둑의 그것과 흡사합니다. 그걸 약 10년뒤에 그대로 카피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그러고보니 딱 10년의 차이로군요.
이창호가 첫 타이틀을 따낸 것이 아마 1986년 경으로 기억합니다. 그 무렵해서 조훈현9단의 문하로 들어갔고 몇몇 프로기사들의 도장들이 그때쯤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시스템이 딱 10년 차이네요.
그리고 그 10년 차이를 가지고 이제 축구에서는 세계 정상권까지는 무리더라도 강호권에의 노크를 시작했습니다. 네 별거 아니었죠, '유소년 교육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와 만들어져서 돌아가기 시작할때의 차이가 이렇더랍니다.
이 차이를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데 걸린 시간이...
30년이네요.
어째 운이 좋게 딱 그 세대에 태어나서 그걸 지켜보고 자라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30년이라는 것,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이렇게 발전할수 있구나 라는 것을 볼수 있었고 관련된 많은 분들과 직접 이야기 할수 있었다는 것을 정말 '값진 30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월드컵과 다음번 월드컵은 그 30년의 증명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주 즐거울 겁니다. 축구는 짧게는 그 경기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이렇게 길게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지금 나는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축구를 좋아하기를 잘했나 봅니다 ^^




덧글
화성거주민 2009/11/20 11:17 # 답글
차범근 감독님의 최대 업적이 '차범근 축구교실'이라는 데 동의합니다.그는 한국 축구에 '미래'를 부여하고자 고민하였고 거기서 더 나아가 미래를 부여하기 위한 실천을 해냈죠.
올해 각급 청대가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게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KFA의 유소년 육성 정책의 결실이라고들 하죠. 그렇지만 그 작업의 시초는 그보다도 10여년 전에 선수 은퇴 직후 한국에 와서 '축구교실'을 열었던 차범근 감독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홍차도둑 2009/11/20 23:46 #
많은 분들이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못했던 것이죠. '차범근'이라는 이름값 때문에 여러 기업에서 스폰을 받고 움직일수 있었던 거니까요. 울산 현대 감독으로 취임하실때에도 이 축구교실의 운영을 놓고 고민 많이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어떤 면에서는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라고 말할수도 있을 거에요, 그분은 분명 하나의 세대를 구분시켜버린 일을 한 거니까요.
그 유소년 육성 정책을 할수 있었던게 바로 차범근 축구교실로 대표되는 그 자원들이 나오면서 그들을 육성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요 ^^
겜퍼군 2009/11/20 12:37 # 답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ㅋㅋ 늘 배울게 많은 글입니다. ㅎㅎ 저같은 소프트 인생에게는^^
홍차도둑 2009/11/20 23:51 #
한 팀을 볼 때 장기간을 보는 것도 분명 필요합니다. 한순간 한순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인 여러가지를 보면 지금은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10년뒤의 모습을 미리 유추할수도 있어요. 2002년 무렵 협회 조중연 전무를 많이 욕했지만 일부는 지지했습니다. 파주 NFC 등을 위해서 뛰어다닌 부분들이지요.요즘 그러고보니 박정희 론에서 이런 말들이 있죠?
'공은 공이지만 과는 과다'
조중연이 과는 있지만 공도 있습니다. 공은 공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거지요.
바셋 2009/11/20 16:03 # 답글
지금까지도 유럽에서 돌아오는 선수 혹은 지도자들이 대체 뭘 봤기에 유소년 관리 타령을 하는지 저도 어줍잖게나마 알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때부터 이미 결판은 나있었던 거죠. 장기적 계획하고 추진하면 분명 우리도 축구 제국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적 문제인 체격의 문제도 좁히는 마당에 그깟 기술 쯤이야...
홍차도둑 2009/11/20 23:57 #
그 동네 시스템 이야기 하면 한숨 나오는거지 뭐. 어렸을 때 가서 봤을 땐 그냥...빌 솅클리 감독이 말한대로 "그래 천국에 와 보니 어떤가?" 라는 말이 것이 실감났었으니까...장기적 계획이라기 보다는 이게 참 그런게 기반은 아래서 닦아버렸지...
서포터가 아닌 그냥 축구를 좋아하는 '서포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다 해 낸 것들이지.
그리고 이미 일부(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축구교실들)이 여름에 여름스쿨 식으로 해서 모여서 전국대회 리그전을 치루는 수준으로 발전했고, 몇몇 대회들이 생기면서 이미 실전경험을 쌓는 수준들...
이제 협회에선 그걸 더 제도화 시키고 많은 부분을 열어줘야 하는 것이 남은 길인데...
정상궤도 2009/11/20 18:17 # 삭제 답글
차범근 감독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차범근 축구교실'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2). "한국인은 맞아야 잘한다"는 공식을 깨고 창의성과 잠재력을 이끌어 낸 지도자가 그 전에 누가 있었을까요?
홍차도둑 2009/11/20 22:57 #
제가 지금 바빠서 긴 시간 할수 없는 관계로 일단 정상궤도님의 덧글에 우선 답글 답니다.말씀하신 '한국인은 맞아야 잘한다'는 공식을 깨고 창의성과 잠재력을 이끌어 낸 지도자가 차범근 이전에 있었습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좀 큰 대회라 할수 있는 것 중 하나인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유일하게 우승을 시킨 고 배기면 감독님이십니다.
(1991년 셰필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의 우승은 한국 각급 대표팀 중 유일한 세계대회 우승입니다.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88팀도 실패했고, 1989년에는 홍명보까지 동원되었는데도 실패했습니다)
이 분 당시에 '국가대표팀보다 강하다'는 고려대(당시 고려대엔 서정원, 노정윤, 김봉수, 이임생, 김병수 등의 인재들이 가득 찬 시대였습니다)를 추계 대학연맹전 결승에서 격파를 해 버립니다. 그것도 전반 초반안에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린 경악스런 경기였습니다. 물론 당시 한양대에 정재권 선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정재권 선수를 철저히 활용하는 '단창전법'을 들고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이 분을 기억하는 분이 많지 않고 잊혀지게 된 것은 1991년의 그 업적을 키우기 전인 1992년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역사는 가정을 인정치 않지만 이분이 살아계셨다면 하는 생각 가지게 되는 몇 안되는 지도자이십니다.
른밸 2009/11/20 20:47 # 답글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요즘 공차러 나가보면 꼬맹이들이 유니폼입고 훈련받는 것을 항상 보는데 볼 때마다 부럽고, 까불까불하다가 공 찰 때 기가막힌 플레이를 보여주면 놀랍더라구요. 밑바닥에서부터 개선되는 모습이 꼭대기까지 이어졌으면 합니다.
홍차도둑 2009/11/21 00:06 #
제 후배중에 부산에서 축구교실을 운영하는 후배가 있습니다.이 후배네 축구교실에는 현직 프로선수(부산)가 가끔가다 강사를 해 주지요. 그 선수 왈 '기술은 우리보다 낫습니다' 였습니다. 저도 거기서 애들이 태클을 촥촥 하는거 보고 입 쩍 벌렸었지요. 아니 원 7살 짜리가 그런 태클을 해 대고, 더 황당한건 그 상황에서 슬쩍 피하는 것도 시도하는 애들...그날 기분 좋아서 부산시내에 들어와서 C1 소주로 목욕을 해 댔습니다. 그게 2007년쯤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배의 동생이 중학교 졸업할때쯤 해서 포항 및 여러 팀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팀 고르는걸 놓고 고민하면서 팀들이 제시한 조건을 보며 참 뿌듣했었지요. 그 결실을 거둘 때가 이제 한 5년 정도 뒤일 겁니다. 지금 19세 이하 대표팀들은 그 시작에 불과합니다. 2년 뒤를 더 기대해 봄직 하지요 ^^
hongdon 2009/11/20 21:30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장기적 계획이라는게 정말 추진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는 것,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만 해도 크라머감독 이후에 엄청나게 배웠고 또 지금 이런 장기적인 계획,
예컨데 100년구상이라든지 유소년축구시스템이라든지... 정말 많지 않습니까?
한국도 아마 지금 추세라면 2010년 후반쯤엔 결실을 크게 보지 않을까 싶네요!
잘 읽고 갑니다!
홍차도둑 2009/11/21 00:17 #
음, 근데 일본축구에서는 100년 구상이란건 없었어요. 그거 놓고 신문선 선생이 조중연 전무에게 공격했다가 조중연 전무가 '그런건 모른다'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실제로 그런 구상은 없었습니다.다만 프로화를 놓고서 준비해야 할 아젠다나 그런 것들은 있었고, 프로팀 즉 J리그 출범 직전의 여러 조건 중 몇가지가 있었습니다.
'전용 홈구장의 확보(되도록이면 구기장 이상급)'
'유소년 클럽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함'
'얼마 이상의 자산 확보'
라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이게 한국에 비해 10년 정도 일찍 체계를 잡은 것이죠. 사실상 JSL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모여져서 '100년 구상' 어쩌고가 된거지 사실상 '100년 구상'이라는 프로젝트로 기획된 바는 없습니다.
J리그 자체의 출범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에 JFL 시절의 팀들 중 몇은 바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랬지요, 얄짤 없었습니다.
물론 장기간의 준비 등은 본받을 만한 거지만 분명한 건 '100년 구상'은 없었습니다. 그러한 준비 과정자체가 철저했었던 거지요
홍차도둑 2009/11/21 02:42 #
아래 _tmp님이 보충해 주셨군요.백년구상을 한번 보고 언제 이야기를 해 봐야겠습니다.
제가 본 것은 약 1985년쯤 시작되서 2005년에 끝나는 부분인 J리그 구상이었는데...다음 플렌에 '백년구상'이라...
또다른 준비들...이런거 비교하는 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여하간 제가 확인하지 않고 답글 단 것은 사과드립니다.
키팅 2009/11/21 01:50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이번 두 청소년 대회를 보면서 드디어 우리도 결실을 맺기 시작하나 싶어 기뻤습니다.
홍차도둑 2009/11/21 02:41 #
이제 첫번째 과실들이 나온 거지요, 그 것을 통해 나온 것들을 본격적으로 수확하는건 5년 정도 뒤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또 뒤에 계속해서 준비되어있는 재능있는 선수들도 많으니까요. 지도자 정비도 잘 되고 있는 편이니까요. 근데 솔직히 여기서 걸리적 되는 문제가 하나 있긴 합니다. 이 부분은 언제 이야기하겠지만...한숨이 좀 나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_tmp 2009/11/21 02:37 # 답글
일본축구 100년구상이라는 게 신선생이 TV토론에서 열변을 토할 때쯤의 J리그의 백년구상과 JFA의 2021년 목표 액션플랜이 뇌내 키메라되어 버린 것인데, JFA의 당시 액션플랜이란 게 신선생이 정말로 100번 정독할 정도의 분량과 구체성밖에는 없었죠.재미있는게 지금 다시 찾아보니 JFA는 2005년에 다시 2050년 목표 플랜을 내놓았고, J리그는 백년구상 사이트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상당히 볼만하게 되었더군요.
홍차도둑 2009/11/21 02:39 #
당시는 대략 아젠다 성이었죠. 그냥 언제쯤 뭐 하고 준비좀 하자 식...흠 다시 만들어진 거군요, 1980년대 후반에 내 놓은 J리그 탄생계획이 사실 2005년쯤으로 마무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가 나온 것이구만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홍돈님께 사과드려야겠군요.
그러고보니 겁나는게 또 어디까지 야들은 생각하는건지 원...
hongdon 2009/11/21 09:31 # 답글
ㅎㅎ아닙니다! ㄷㄷ그럴 수도 있죵'전용 홈구장의 확보(되도록이면 구기장 이상급)'
'유소년 클럽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함'
'얼마 이상의 자산 확보'
이부분은 지금도 J리그 가맹할 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네요~
무조건 시찰받아야하고요(그래서 내년엔 JFL애들이 J에 가맹안한다고 들었습니다
돈이 별로 없는드슷...)
http://www.j-league.or.jp/100year/
이건 백년구상 사이트입니다.
알기 쉬운 사이트 이름이죠(푸핫 100year라니 처음엔 웃었는데 말이죠)
거의 대대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라 얼마전엔 상금 50만엔 걸어놓고 컬럼 모집도 했었다죠
(응모했는데 떨어졌습니다 푸하하..) 아무튼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홍차도둑 2009/11/21 10:11 #
그러한 재정적 조건및 인프라 조건은 아무리 봐도 한국 프로리그의 난맥에서 보고 배운것 같아요. 전북이 이전에 걸었던 '완산 푸마'같은 희대의 사태를 일으킬순 없다는 것이었겠죠.백년구상 사이트를 아직 자세히 못보고(일어는 잘 못해요...) 일단 흩어는 봤는데 1980년대의 그 때와 비슷한 구상으로 한 뒤 천천히 구체화 시킨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정부 주도의 꽉 잡힌 시간표일정이 아니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 한걸음 한걸음 가고 있다는 거겠죠.
꽃곰돌 2009/11/26 07:35 # 답글
잘 보고 가옵니다~.~
홍차도둑 2009/11/26 10:01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