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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수 없는 스승 발레리 니폼니쉬 감독님...2 S1






(사진은 니폼니쉬 감독님의 한국에서의 고별전이 끝난 뒤 목동경기장에서...1998년 가을이다...
이 사진의 에피소드 하나...저 뒤에 모노포드 비슷한 것을 잡고 계신분...니콘클럽 회원중 한분이시다...내가 니콘클럽에 가입하자마자 '하이텔축구동의 티라노님 아니십니까?'하고 첫 쪽지를 날려주신 분이셨다...참...지금 생각하면 돌고돌아 여기서 만나뵙게 되었다...들고계신건 우산이었단다. 저 우산에 사인받으셨다는데...잘 보관하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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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있어선 여러 스승이 있다.
하지만 축구에 있어서 스승이라 하면...난 발레리 니폼니쉬(네폼네아치)를 꼽는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신문지상에서였다. 1990년 월드컵을 앞두고 일간스포츠에서 본선진출 24개팀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데 카메룬에 대한 설명에 니폼니쉬의 캐리커쳐와 함께 '불굴의 사자'라는 등의 설명이 올라와 있었다.

그해 카메룬은 니폼니쉬의 지휘하에 아프리카팀으로는 사상 첫 월드컵 8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때 난 니폼니쉬보다는 노장 로제 밀러에 관심이 더 있었다.

니폼니쉬의 이름을 다시 한번 듣게 된 것은, 몇년 뒤였다. 박성화 감독이 물러나면서 유공(당시, 서울은 유공, 일화, LG가 동대문을 같이 썼다. 때로는 하루에 두경기가 벌어지는 '동시상영'이 있던 때였다)감독을 물러나면서 후임 감독으로 온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국에서 다섯번째 외국인 감독이었다.
[첫번째는 청소년 대표팀의 아담스(스코틀랜드), 두번째는 대우를 맡았던 동독 출신의 엥겔과 헝가리 출신의 비츠케이 감독이, 1992올림픽 대표팀을 맡은 독일의 디트마르 크라머 감독이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유명한 사람이 왔구나...'싶었을 뿐이고, 과연 그가 어떤 축구를 보여줄까 하는 관심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하지만 운명의 흐름은 나와 니폼니쉬를 만나게 했다.

1994년 프로축구 서포터 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이텔 축구동에서 의도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대상은 유공이었다. 당시 일화는 박종환감독의 인기를 바탕으로 경기당 1만명 내외의 관중을 몰고다니고 있었고, LG는 창원, 공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랑극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름대로 관중몰이를 성공적으로 이끈 구단이었다. 다만 유공은 그런것 없이 있어 당시 평균관중 약 5천명 정도의 팀이었다. 때문에 '그런팀에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견으로 뭉쳐서 한국 프로축구팀의 서포터 운동은 유공에서 불길을 당겼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니폼니쉬 감독과 조우할 기회가 계속 생겼다.
그래서 통역을 통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곤 했다. 니폼니쉬 감독은 나의 질문에 친절하고 자상하게 답변해 주곤 했다. 때론 선수단 숙소를 방문하곤 했다. 주로 코칭스태프나 아는 선수들(지금은 다른팀으로 많이 옮겼지만)과의 대화를 하던가 하는게 주였지만...때론 니폼니쉬 감독하고도 진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때 너무 수고를 해준 강창석 통역님껜 지금도 고마운 마음 이루 말할 길이 없다.

때론 선수들과 한국축구를 걱정하기도 해 주시고, 때로는 날카로운 분석을 해 주시기도 하며, 축구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간가눈줄 몰라 선수단과의 미팅시간이나 저녁시간을 훌쩍 가기도 했다.
(이때 사진기가 없던 것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쩝)
강창석 통역이 없을 때에도 어눌하고도 짧은 영어로 뭔가 말씀해 주시기도 했지만...중간에 서로 짧은 언어로는 이야기하기 힘들어 결국은 '통역이 오면 더 이야기를 하자...'하고 서로 멋적게 웃기도 했었다.

당시 유공(얼마뒤 SK라는 현재 이름으로 개칭한다)은 목동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었다.
유공은 1989년에 리그우승을 차지했지만...나는 지금도 단언하지만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의 4년동안의 '목동시대'를 부천의 최고 전성기로 꼽는다. 그 4년중 3년은 니폼니쉬가 감독으로 있던 때이다.
1997년을 기점으로 많은 팀들의 서포터가 태어났다. 그들도 부천의 니폼니쉬 감독을 한편으로 존경하던 때이다. 수원을 제외한 모든 구단의 서포터들이 부천의 축구를 보면서 '정말 재미있다'라는 말을 했고, 그리고 '우리가 이겼지만 정말 부천 축구는 짜임새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 축구를 구사하게 만든 니폼니쉬 감독에겐 많은 찬사가 있었다. 1997년에 리그 꼴찌라는 최악의 성적을 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니폼니쉬는 성적이 꼴찌였으므로 짤라야 한다'는 말을 안했다.(그런말 했다간 아마 나부터 '이눔시키!' 하면서 욕을 해 댔을거다.) 되려, '구단이 지원을 안해줬으니 그렇지!'하며 구단을 욕했을지언정 니폼니쉬감독을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니폼니쉬 감독은 "선수생활, 감독생활을 하면서 꼴찌를 해본건 처음이었어요"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해줬다. 그리고 곧 이어 이렇게 말했다. "너무 오래 고향을 떠나 있었네요..."
1998년 봄이었다. 그해는 바로 니폼니쉬의 2차계약이 만료되는 해였다. 그 말은 '재계약은 없을 것이다'라는 뉘앙스였다. 그 말뜻을 알고 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 팬들은 당신이 더 이곳을 지켜주길 바랍니다." 이 말 밖에는 할수가 없었다.
웃어주면서 등을 두들겨주던 감독님의 모습은 지금도 눈가에 선하다...

.....................

나에게 있어 니폼니쉬에 대한 가장 안타까운 기억은 1997년이었다. 1997년 아디다스컵에서 부천은 선두를 달리면서 아디다스컵 2연패를 눈앞에 놓고 있었다. 전남과의 원정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1위가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부천은 그 경기에서 무려 6실점을 하며 5위로 추락했고, 전남은 우승 일보직전까지 가는 '역전드라마'가 일어났다.
난 그때 광양경기장에 있었다.
'2연패 우승'을 축하해 주기 위해...대형 깃발을 낛시대에 매달고 갔었다. 하지만...푸른색의 부천 깃발은 제대로 흔들지 못했다. 4-0이 되었을 때...난 낛시대를 접고 말았다. 더 경기를 보기 싫어졌었다.

경기가 끝난 뒤 나와 안면 있는 선수들은 붉으락푸르락하며 화를 냈다. 당시 부천의 최고스타인 윤정환이는 사인해달라는 어린 축구팬에게 '지금은 못해준다'라며 사인을 거절했을 정도다. 생각해봐라...6-0으로 져서 우승 직전에서 5위로 미끌어졌는데...누가 사인할 기분이겠는가...
조윤환코치와 함께 선수들은 라커룸에 들어갔다. 난 밖에 있었지만 조용히 문이 열리면서 니폼니쉬 감독님이 나왔다.
메마른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그는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건강이 나빠져서 담배를 끊었다는 그가 담패를 다시 물었다는 것은...그만큼 속이 답답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는 나를 보더니...특유희 목쉰 목소리로 짧은 영어로...
" I am sorry " 라 해 주셨다.

감독님...미안하긴 뭐가 미안하십니까...그게 다 감독님 책임이십니까...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럴땐 누굴 욕해야 할까...아무도 욕할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흐르는 나의 어깨를 두들겨주시며...계속 "Sorry"만 하시는덴 뭐라 해야 할까...

전남의 축구팬들이 니폼니쉬 감독을 발견하고 사인요청을 했다. 그런데 웃으시면서 하나하나 그 모습에 응하셨다. 난 그 모습을 보면서 속이 끊어지는 듯 했다. 감독님의 속은 어떨까...우승 직전에 날라간 패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스러웠다.(나중에 물어보니 "팬에 대한 의무인거죠..."라시는데...)

난 그날 결국 서울로 올라오지 못했다. 광주에 사시는 전남 서포터의 대부 박숭범형님이 내 모습이 보기 안스러우신지...날 광주로 끌고 간 뒤 삼겹살에 소주를 사 주셨다. 그날 아마도 소주 여덟병을 혼자 마신걸로 기억한다. 나중엔 소주병나발도 불어제꼈던걸로 기억한다. 너무 허탈해서 진이 빠진 나의 몸은 이틀동안 광주에 있었다.

관중석을 보실 때 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경기장을 언제나 삥 돌아가시던(선수들이 뛰는 잔디를 구둣발로 밟을 수 없다고 언제나 경기장을 삥 돌아가셨다. 다른 감독들이 씩씩하게 잔디를 가로지르는 동안...)그 모습을 이제 볼 수 없는 날이 다가왔다. 고별전은 리그 마지막 경기였다.

목동에서 열린 그 경기에서 부천 서포터들은 경기가 끝나자 올드랭 사인을 부르면서 감독님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서포터뿐 아니라 목동에 사시는 축구팬들, 그리고 부천에서 오는 분들까지도 '니~ 폼니쉬'를 연호하며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우는 사람도 있었다.
난 라커룸으로 내려갔다. 감독님을 만나뵈었다.
"언젠가 다시 오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만나뵈러 가겠습니다" 나의 그 말을 통역에게 전해받은 니폼니쉬 감독님이 악수하는 손엔 힘이 가득했다. 나이 60인 할아버지의 힘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그게 위에 올려놓은 사진이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다. 내가 니포감독님과 함께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었다...감독님은 웃고 계셨다. 팬에 대한 마지막 서비스였을 것이리라...
떠나시는 감독님의 가슴속은 어떠셨는지 모르겠다. 그건 나중에 한 2년정도 뒤에 따로 전해듣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입고 다니던 스페인 대표팀의 유니폼에 사인을 받았다. 지금은 많이 바래져 있지만...그 사인은 나의 보물중 하나다. 대놓고 말하건데...내가 받은 유명축구스타의 사인중 가장 비싼 싸인은 호나우두의 싸인이지만 '너가 가장 아끼는 사인은 누구거냐?'라고 묻는다면 난 니폼니쉬와 이임생의 사인을 꼽을 것이다.

그리고...그는 떠났다.
공항에 나가보지는 못했다. 몇시 비행기인줄 알고 있지만...나가지 못했다. 아니다...나가서 생기는 일이 어떨지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분명 당시 내 혈기왕성한 성격으로는...니포감독...아마 우리나라 출국 못했을것이다. 내가 경찰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붙잡고 늘어졌을것이다.
아마도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 해낼 것이다.
"Captain! My Captain!" 이러면서 난리쳤을 것 같다.

.......................

2001년이었다. 그가 간지 2년이 되었던 해에...
니포감독은 중국팀에 둥지를 틀었다.
난 가끔가다 중국의 티탄저우보라는 스포츠 신문에 글을 쓰곤 한다. 그쪽의 기자가 니폼니쉬를 취재하고 왔다고 알려줬다. 한국의 팬들은 어땠는지 물어보자 니폼니쉬는
"그때 한국팬들의 열정은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비록 수는 적었지만 나와 팀에게 언제나 지지와 응원을 해 준 멋진 팬들이었다"라고 말해줬다 한다.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터키의 슈퍼스타인 알파이 외잘란이 얼마전에 이런말을 했다.
"월드컵때 거리로 나온 수많은 축구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왜 축구장은 텅텅 비어있는가? 심지어 대표팀 경기에도..."

외잘란에게 한마디 해 주고 싶다.
"이봐...그 사람들은 축구팬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었어... 애국심에 나온 것이지 축구가 좋아서 나온 것은 아니었어...지금 경기장에 나오는 사람들이야말로 축구팬이야...이전에도...지금도...그정도가 한국축구팬의 기반이야...부끄럽지만...그게 진실이야. 여긴 당신이 뛰던 유럽이 아냐..."

그 작은 수 안에서도 그러한 무브먼트가 있던 것을...한국축구에서 무려 5년이라는 최장수 외국인 감독을 했던 니폼니쉬기에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해 준것이라는 것을 중국기자나 나나 알고 있었다. 가슴안에 뭔가 뭉클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 기자분의 다음말이 날 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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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석군을 아십니까? 목동에서 북을 치던...뚱뚱한 친구요, 가끔가다 낛시대에 부천 깃발을 둘러메고 원정응원까지도 했다던데..."라고 물어보았다네...그러자 니포감독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기억난다고, 그 친구하고 연락은 되는지, 잘 지내는지를 물어보시더군...1997년 컵대회 마지막 경기는 잊을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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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자의 립 서비스는 아니었을 것이다.(이분은 조선족 출신으로 현재 조선족 프로축구팀의 사무총장을 맡고 계신다)

날 기억해 주신다는 말을 보자...난 울고 말았다. 그냥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독님...절 아직도 기억해 주신단 말입니까...모니터를 붙잡고...'으어!' 한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 한마디를 한 뒤...울고 말았다.
울음밖엔 난 할 수 없었다.
한참을 울었다.

부모님이 뭔일이냐고 물으실 정도였으니까...다음날 회사에도 눈이 퉁퉁 부은채로 출근하고 일도 손에 안잡혔다. 계속 그 글만 볼 뿐이었다.
지금 건강하실까...중국쪽은 성적 나쁘면 감독을 곧바로 짜른다는데...그분의 신사같은 성격이 과연 중국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일만 없다면 그냥 중국으로 날라가고 싶었다. 중국기자에게도 '시간 맞으면 같이 니포 다시 보러 가자 제발 부탁이다!'라고 메일을 보냈을 정도였다.

2002년의 감독을 놓고 니폼니쉬가 언론의 하마평에 오르자 난 그가 오길 희망했다. 하지만 축구협회의 선택은 히딩크였다. 니폼니쉬에 대해 조중연은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실패한 감독이다" 나는 발끈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니포의 성적은 보잘것 없었으니까. 그리고 니포가 왔으면 한국은 4강의 성적을 낼 수 있었을까에 대해...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다.
"역사는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그리고...지금도 난 니포감독과 만나지 못하고 있다....

....................

그는 나에게 주고 간 것이 너무 많다. 그의 분석은 나에게 또다른 축구의 경지를 열어주었고, 또다른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좁은 세상에서 나만의 우물, 나만의 동굴에 빠져있던 나를 우물과 동굴에서 꺼내줘서 '세상은 이렇게 넓단다'를 알려준 분이었다.
그리고...'신사'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분이기도 하다.
당시 언론들은 니포감독을 일컬어 '러시아 신사'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렇다. 그분은 신사셨다. 아마 그를 아는 사람이면 '러시아 신사'라는 단어에 쉽사리 동의를 할 것이다.
'신사'라는 단어 말고 더 멋진 단어 없냐고 그 단어를 찾던가 만들자고 하는 분까지 계셨다.

나는 그에 대해 글을 쓸 때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 표현을 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어찌 보자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부드러운 것과 카리스마는 정반대의 단어 아닌가...하지만 니포는 그랬다. 너무 부드럽고 자상한 그의 인상과 태도...그리고 그의 마음을 접하면...당신은 이미 그의 팬이 되어버려 있게 된다. 너무나도 부드럽게 다가오지만...사람을 빨려들게 하는 매력, 그리고 그 매력과 인품에 반하게 되는...그런 사람이었기에 주저없이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 말을 썼다.

이후락이 그랬던가..."나는 박정희교 신자"라고.
나도 그렇다 나는 '니포교 신자'다.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나의 짧은 축구인생에 있어...가장 큰 영향을 줬던 사람이라면 난 주저없이 니폼니쉬 감독을 꼽는다.
내 인생에 있어 감히 '스승'이라는...그리고 '선생님'이라는 높임말을 진심으로 존경과 함께 부쳐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 나올지 모르겠다.
하지만...분명한 것은 니폼니쉬 감독은 그 '스승'중 한명이다.

그와의 기억은 4년밖에 없다. 현재 33살인 나로선 그와의 기억은 내 인생의 1/8밖에 차지하지 않는 짧은 기억이다. 하지만...그는 내 가슴속을 헤집고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며칠전...또다시 그의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축구팬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평생 잊을수 없는 즐거운 기억을 선물해 주었다.'라는 그의 대답을 보며...
난 다시금 울었다.

나도 니포감독의 대답과 같다.
니포감독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대한민국 월드컵 4강'의 히딩크 감독보다...내 마음속엔 화려한 성적을 남기지 못했더라도 한국축구의 또 다른 가능성을 히딩크보다 앞서 보여주었던...당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고, 가슴속에 담고 갈 것이라고.

오늘은 스승의 날...
난 스승의 날이면 그가 떠오른다.
니폼니쉬 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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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5 한 사진클럽에 올렸던 글이다.
지금도 이 맘은 변함이 없다.

(배경으로 깐 노래는 루루의 To sir with Love
스승의 날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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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바셋 2008/05/15 02:05 # 삭제 답글

    카메룬이 소련에게 부러 져주는 모습에 감독이 지시했을리는 없고 선수, 국민들이 많이 존경하나보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역시나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았군요.
    서포터 운동이 94년에 시작되었다는 것도 첨 알았습니다. 생각보다 늦네요... 그때 전 21살이었고 한창 추국 좋아할 때인데 한국에 없었던 시기라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 국내에 있었더라면 홍차도둑님을 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홍차도둑 2008/05/15 02:19 # 답글

    그 질문을 할까말까 늘 고민했는데 끝내 못하고 말았습니다...ㅎㅎ 어떤 면에선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놓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변명을 하고 있지요.

    음 정확히는 1993년 1월쯤 해서 하이텔에 축구동 만들자는 논의가 일어나서 실제 행동 나선게 2월, 그리고 신청이 3월에 들어갔습니다(2월 이후 제가 초대 대표시삽으로 일을 진행시켰지요). 그런뒤 개설이 5월 예정이었는데 그때 이른바 '하이텔 파업'사건이 벌어져서 동호회 개설이 10월로 늦춰졌습니다. 그리고 1년뒤인 1994년 4월쯤 해서 시즌이 끝난 뒤 '우리 응원도 해 볼까?' 하고 해서 1994년에 서포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지요 ^^
    (지금도 이런 것으로 논문 쓰겠다는 사람들이 저 찾아내곤 하더군요 ㅎㅎ)

    저하고 연배 차이가 얼마 안나시네요 ^^
    뭐 언제 경기장이나 다른 곳에서 뵐수 있지 않겠습니까 ^^ 첫 댓글 감사합니다.
    말씀드렸지만 그동안 로봇 공격 때문에 닫았다가 풀었습니다. 또 공격 시작되면 닫아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봇 때문에 닫는다고 공지할터이니 이해해 주세요 ^^;;
  • 바셋 2008/05/15 02:46 # 삭제 답글

    수정하려고 x표 눌렀더니 지워져 버려서 다시 씁니다 ㅋㅋ
    저땜에 일부러 여신 것 같아 괜히 죄송스럽네요.
    저는 직장관계로 중국에 살고 있습니다. 철들고 대부분의 시기를 여기저기 외국에서 보낸지라 한국리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한국리그의 산증인이 계시니....... 앞으로 귀찮게 해드릴 계획입니다^^
    차를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저도 그렇습니다. 질보다 양으로 먹는다는 것이 차이겠지요...
    중국 차 사업을 하는 친구가 있으니 언제든 말씀 주십시오.
  • 홍차도둑 2008/05/15 02:55 # 답글

    아...괜찮습니다. 언제 열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기도 했습니다 ^^
    오...중국에 사시는군요 ^^ 어이쿠 이거 얼마나 괴롭히실지...벌써부터 긴장됩니다.

    오오...저에게 있어 차는 거부할수 없는 유혹이옵니다. ^^
    언제 부탁드립지요 ... ^^
  • 로무 2008/05/15 10:23 # 답글

    옷입은거 보고 이탈리아에서 바느질하는 아저씨인줄 알았음;;; 쩐다...
  • 홍차도둑 2008/05/15 11:15 # 답글

    ㅎㅎㅎ 감독님이셩~
  • 푸른별빛 2008/05/16 00:49 # 답글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전 98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해서 90년대 전반의 기억은 별로 없어요. 중학교 때던가, 이삿짐 싸다가 왠 LG 대 일화 경기가 있더라구요. 이상윤 '선수'가 있던...그 테이프도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요. 부천 축구가 한창 타오르던 90년대 중반을 중국에서 보내서 전 듣기만 했지 별로 보진 못했어요 ㅠㅠ 참 아쉬운...

    홍차도둑님이라면 혹시 아실까 싶은데, 수원과의 경기에서 윤정환 선수의 하프 발리슛으로 3:2로 이긴 경기가 혹시 있나요? 이 경기를 보고 윤정환 올인모드로 빠졌는데...어떤 경기인지 기억이 안나네요 ㅠㅠ
  • 홍차도둑 2008/05/16 00:55 # 답글

    3:2 는 아니고 2:1일거 같습니다. 이상하게 부천과 수원과의 경기에서는 3:2 스코어가 나온적은 없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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