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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감독 니폼니쉬 - 1 S1

미디어다음 스포츠 명예기자
양원석 blokhine@hanmail.net

니폼니쉬라는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0년 월드컵을 앞둔 어느날이다. 당시 일간스포츠에서 1990 월드컵 특집으로 나온 각국의 전력분석에서 카메룬의 대표팀 감독에 '네폼네아치(Nepomniachtchi)'라는 러시아인의 캐리커쳐가 올라와 있었다.

신문은 당시 카메룬의 전력에 대해서 “카메룬 선수들은 '불굴의 투혼'을 가지고 있다"라는 인상적인 평가를 내렸었다. 그 말대로 카메룬은 첫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격침시켰고 그 뒤 루마니아, 콜롬비아를 잇달아 꺾으면서 아프리카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8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때만 하더라도 니폼니쉬 감독은 나에게 있어서 '머나먼 사람' 일뿐이었다. 하지만 1994년 10월 ‘머나먼 사람’은 한국에 오게되었다. 당시 유공(현 부천)의 박성화 감독이 물러나면서 니폼니쉬 감독이 취임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대단한 사람이 오는구나' 하고 단순히 생각하기만 했다.

1995년부터 자주 참여는 안했지만 유공의 서포터스 활동을 하던 나는 점차 니폼니쉬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갔다. 그리고 1996년, 유공은 연고지를 부천으로 확정하고 서울 목동운동장에서 홈 경기를 치뤘다.(당시 부천엔 경기장이 없었다.)

서포터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선수단과 친분을 쌓아 선수단 숙소에 찾아가기도 했었는데 그때 바로 니폼니쉬 감독과 이야기를 할 기획가 생겼다. 통역인 강창석씨와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건 '참 다정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축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편협해져 있었던 축구에 대한 시각을 많이 바꿔주었으며, 또 감독 자신의 축구철학뿐만 아니라 한국이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성적을 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차근차근히 말씀해 주시며 한 축구매니아의 눈높이을 높여준 것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 첫만남이 끝난 뒤 통역인 강창석씨는 이런 말을 했다. "전 감독님의 인품에 반했습니다. 평생 모셔도 될 분이에요". 그 말은 지금도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직접 느낀 것은 1997년 아디다스컵 마지막 경기였다. 당시 부천은 승점 2점만 추가하면 우승이 확정되는 경기였다. 난 그날 대형 부천 깃발을 챙겨 들고 광양으로 내려갔다.
차가 막혀 늦게 들어서니 이미 전반은 0-2로 뒤진채 끝나있었고 전남은 부천을 유린하며 6-0의 대승을 이끌어냈다. 아마 지금까지도 전남이 프로구단과의 경기에서 거둔 최고의 대승이었을 것이다.

광양의 관중들은 신바람이 났지만 내 맘속은 그렇지 못했다.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으로 내려갈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라커룸 안쪽 샤워실 부근에 그냥 서 있었는데 안쪽 문이 열리면서 니폼니쉬 감독이 조용히 나왔다.

담배를 꺼내시며 조용히 불을 붙이던 니폼니쉬는 나에게 어눌한 영어로 "I'm sorry"라는 한마디만 하셨다. 그말로 충분했고 필자의 볼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 조용히 "We team's not fortune"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돌아가는데도 부천 선수들은 화가 나 있었지만 니폼니쉬 감독은 몰려드는 팬들의 사인공세에 웃으면서 하나하나 답해주셨다. 솔직히 그런 상황이라면 어느 누가 그냥 넘어가겠는가.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사인을 해주셨다.

그리고 운이 다했는지 그해 부천은 정규리그 꼴찌를 했다.

이후로도 니폼니쉬 감독에겐 운이 따르지는 않았다. 1998년 아디다스컵에서도 최종 결승엔 진출했지만 울산과의 결승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그쳤다. 정규리그에서도 별로 힘을 쓰지는 못했다.

그리고 니폼니쉬는 조용히 한국땅을 떠났다. 떠나기 전 필자와의 만남에서 니폼니쉬 감독은 "너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있었습니다"라고 떠나는 변을 대신했다. 한국에서의 인상이 어땠느냐를 묻는 필자에게 "좋은 기억들이 많았다. 배우고자 하는 선수와 코치를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라고 필자에게 답을 해 줬다. "또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는지...팬들은 당신이 계속 있길 바란다"는 질문에는 "기회가 된다면 언제나 올 것이다."라고 하며 한국무대를 떠났다.

이후 니포는 J리그의 히로시마 산프레체 감독을 거쳐 중국프로리그에 둥지를 틀었다. 니포가 한국에 인연을 또다시 맺을 기회는 2002 월드컵 감독 선임 문제였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아쉽게 예선에서 탈락한 한국축구는 월드컵 감독으로 '외국인 감독'을 영입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팬들 사이에서는 "한국축구에 경험이 많은 비쇼베츠나 니폼니쉬가 오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특히 니폼니쉬는 카메룬 대표팀을 이끌고 '8강'이라는 성적을 냈기에 더 기대감이 컸을 것이다. 니폼니쉬 자신도 솔직히 욕심이 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축구협회의 '감독 후보자군'에 니폼니쉬는 들어있지 않았다. "니폼니쉬는 분명 실패한 감독이다"라는 이유가 컸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분명 성적면에서 니폼니쉬축구는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1996년 아디다스컵 우승이라는 것 외에는 우승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2 월드컵 감독은 다들 아시다시피 히딩크가 맡았으며 히딩크는 '4강신화'를 만들어냈다. '니폼니쉬가 맡았다면 과연 4강을 만들어 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은 "모른다. 하지만 4강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라 하겠다.

분명 '니포축구'라는 부천의 축구는 성적면에선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 '니포축구'는 1990년대 후반에 한국축구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사실이다.

'니포시대'의 미드필더진은 당시 전문가들조차 탄성을 자아낼 만큼 탄탄함을 가지고 있었다. "미드필더만 놓고 보면 대표팀을 능가한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윤정환-윤정춘-조셉-김기동으로 이어지는 부천의 미드필드진이 이끌어내는 경기들은 지금 다시 보더라도 경탄이 나온다.

물론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이들이 엮어내는 플레이에 팬들은 감탄했으며, 심지어 타 팀의 서포터들조차도 "승부는 우리가 이겼지만, 우리도 '뻥축구'가 아닌 부천같은 플레이를 했으면 좋겠다"고 경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부천의 '목동시대'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의 4년간이다. 이 시기를 놓고 필자는 '부천의 최고 황금시대'라 부르기에 주저치 않는다. 물론 부천은 1989년에 정규리그 우승을 하며 팀 최고의 성적을 올렸지만 팬과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시기는 분명 '목동시대'이다.(개인적으로는 1996년의 경기들을 부천의 '베스트트랙'으로 생각한다)

이 시기를 지킨 니폼니쉬의 축구에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팬들도 많다. "이것이 '재미있는' 축구다"라는 것을 보여준 니폼니쉬 감독때의 부천팀을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필자는 오래전 하이텔 축구동호회에 니폼니쉬 감독의 카리스마를 일컬어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명명했던 적이 있다. 강인한 이미지가 아닌 부드럽게, 그러나 어느샌가 그의 인품에 녹아들어 자연스레 팬이 되게 만든 그런 거부할 수 없는 이미지가 필자에게 남은 니폼니쉬의 이미지이다.

지금은 서포터간의 골이 깊어져 상대팀 감독을 비난하는 경우가 잦지만, 아마 '팀을 옮기더라도 비난하지 못할 감독'을 꼽으라면 니폼니쉬 감독은 분명 그 첫손에 꼽힐 것 같다.

2000년이던가? 중국 티탄저우보의 송청운 기자가 니폼니쉬 감독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때의 한국팬들이 나에게 보여준 애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단다. 니폼니쉬 본인은 아직도 '목동시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천이 지금 떨어지는 성적을 내는 가운데에서 니폼니쉬를 다시 불러오길 바라는 팬들이 적지 않다. 필자도 그 중 한명임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만약 니폼니쉬가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니폼니쉬의 '목동시대'를 기억하는 팬들은 많을 것이다.

니폼니쉬는 히딩크처럼 '강렬하고 분명한 기억'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기억하는 팬들은 니폼니쉬를 '잊을 수 없는 감독'으로 꼽을 것이다.

"나는 신체적 문제 때문에 선수생활을 일찍 접었습니다. 그래서 감독 생활을 일찍 했지만 그점에 있어서 아쉬운점은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던 축구장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선수로서 기쁨은 포기했지만, 감독으로서의 기쁨을 즐기고 있습니다. 좋은 선수를 만나서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것.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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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03년쯤인가에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기사를 쓴 뒤 많은 목동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메일이 쇄도했다.

그분들은 니폼니쉬에 대한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나의 스승의 날에 어울리는 단 한분의 축구감독.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발레리 네폼네아치 당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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