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2000년 부천의 행보는 윤정환을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윤정환은 세레조 오사카로 둥지를 옮긴다.
2000년은 윤정환과 부천 모두 우승 고지에서 탈락하는 해가 되었다.
부천은 대한화재컵을 우승하며(이 경기 잠실에서 열린 현재까지의 마지막 프로 축구경기다.) 시즌을 깔끔하게 출발했다.
리그 시작 개막전에서도 수원을 수원에서 1-5로 잡아버리는 괴력까지 발휘했다.
거기다 이 경기는 한국 축구역사상 골키퍼가 어시스트를 기록한 전무후무한 경기가 되었으며 이용발의 K리그 기록엔 골이 아닌 '어시스트1'이라는 마크가 새겨진다. 이용발의 엔터테이먼트한 성격과 장점이 확실히 발휘뒤기 시작한 해가 이 해이기도 하다. 칠라베르트처럼 프리킥은 나와서 다 찼고, 두건, 여러가지 모자패션이 등장한 해다.
사실 이용발의 경우는 자기노력이 대단한 선수였다. 상무나 경찰청에 가지 못하고 일반 군을 가서 2년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결국 복귀한 것이다. 선수들 말을 들어보니 "뭐 복귀하고나서 처음 몇달동안은 골 넣기 쉬웠지 머리 위로만 보내면 방향을 못잡고 무조건 골 주더라니깐?"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반면 윤정환이 이용발을 평가하는 것은 달랐다.
"그래도 공격으로 전환할 때 용발형이 최고야. 곧바로 킥 하면 바로 공격쪽에 나가있는 선수에게 지대로 빨리 연결해 주거든, 나처럼 공격지향적인 선수에겐 딱 좋지" 이 말은 지금까지도 적용된다. 한국의 골키퍼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빨리 연결해 주는 선수는 아직까지 못봤다. 분명 에드빈 판 데 사르 같은 빠른 패스가 곧바로 침투하는 선수에게 연결시켜주는 선수는 한국 프로축구에선 아직까지 이용발뿐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증거로 '어시스트1' 이라는 것이 박혀 있으니 말이다.
이해는 무조건 승부를 내는 해였다. 이름하여 경기 끝나면 승부차기 해서 승점 배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 프로기록을 살펴보면 스코어상으로 무승부인데도 승이나 패가 기록된 경기들 꽤 된다)
이해 부천의 미들 운영보다는 수비 운영이 빛난 해였다. 이임생-유상수로 만들어진 중앙수비는 한국 선수들로만 구성된 투스토퍼 체제에서의 지역방어를 확실히 구사한 선수들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임생의 스타일 변화였다.
'개인기가 중요합니다' 라면서 정규 훈련 뒤에도 개인 드리블, 트래핑 연습을 하던 그는 수비중에도 갑자기 역주행하다가 또 다시 U턴 하는 등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상대 공격수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일반적인 수비들은 밖으로 차내기 바빴는데 유유히 드리블해 나오면서 일단 돌파당하니, 공격수들로선 처음 겪어보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서 나온 시간과 공간을 이용해서 미들로 바로 연결해 주면 미들에서 다시 역습이 진행되는 방식에 상대팀들은 꽤 당황했다. 대인마크만 보던 이임생이 이러한 여유를 보여주자 '꾀돌이'로 대학시절부터 명성을 떨쳤던 유상수와의 콤비가 가능해졌다. 그 결과 양쪽 윙백의 전진배치, 그리고 미들의 보강은 두꺼운 허리를 만들어냈다.
(이때엔 이임생-유상수만 남겨놓고 전원 공격가담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이 모습은 1996년에도 많이 보였지만 외국인 선수 없이 한국 선수들로서만 이렇게 두명이 전원 스토퍼-스위퍼를 동시에 해치우는 선수조합은 이때밖에 없었더라는 것이다)
윤정환이 빠졌지만 부천은 윤정환의 유산을 확실히 지키기도 했다.
윤정환이 빠진 만큼 스피디한 공격을 기대하기 어려워지자 투톱의 역할도 바꿨다. 이때 나온것이 바로 '전반 이성재-후반 이원식'의 K리그 역사상 최고의 해결사 조합중 하나가 나온 것이다.
전반에 힘이 좋은 이성재가 수비를 헤집고 다니면서 수비 힘을 다 빼놓으면 후반에 센스가 좋은 이원식이 투입되어 힘빠진 수비를 공략하는 이 조합은 한때 K리그 팀 감독들이 '알면서도 당한다' 라고 혀를 내두르는 공격조합이었다.
(그러고보니 이해 골든골을 넣은 이원식 선수를 향해 부천에서 강달성군이 경기장으로뛰어들어 선수와 얼싸안는 세레모니도 처음 한 해다. 나중에 이 때문에 이원식이 등장했다 하면 부천 서포터의 맨 앞줄이 경기장 뛰어넘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압박용 응원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부천은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했다. 초반 정규시간 연승을 달리면서 벌어놓은 승점을 후반들어 많이 깎아먹었기 때문이다. 초반 선두를 달리기도 했지만 베스트멤버의 백업 없이 전 시즌을 다 소화하기는 무리였다. 그래도 대단한 것이 꼭 잡아야 하는 경기에선 확실히 잡아버리는 저력을 발휘하며 턱걸이를 한 해였다.
플레이오프에서 성남에게 역전을 허용할 뻔 하다가 골든골로 간신히 이기기도 했다.
(요것도 특이한 예다. 유럽에서 흔히 보는 그 예로 홈에서 3-1로 이겼지만 원정에서 1-3으로 지는 바람에 연장전을 치뤄서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성공시켰다. 그래서 결국 2-3으로 졌지만 우세승을 거둬 결승에 올라간 케이스였다)
결승전은 불합리한 룰이기도 했다. 안양이 첫경기에서 1-4로 목동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안양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에서 1-1로 비겼지만 승부차기까지 간다. 결승전은 어떡하던 승부를 내야 했으며 만약 이 승부차기에서 이기면 3차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건 말도 안되는 매우 불합리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안양은 승부차기에서 이겼다. 안양의 우승,
부천은 돌풍을 일으키면서 조윤환은 니포의 후계자로 떠받들여졌다. 30대 감독의 젊은 돌풍 운운하며 메스컴에 총아가 되었으며, 윤정환 없이도 이뤄낸 부천의 미들플레이엔 찬사가 쏟아졌다.
분명 윤정환 없이도 보여준 부천의 안정된 미들플레이는 역설적으로 말해 윤정환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윤정환이 보여준 여러 공격조합과 움직임은 부천의 다른 선수들에게 영향을 주었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패싱플레이는 알게 모르게 부천의 다른 선수들에게 중독되어 있었다.
(이 상황이 바뀌려면 2002년 최문식의 입단까지 기다려야 한다.)
때문에 윤정환이 빠졌음에도 다른 선수들은 스스로 윤정환이 보여주던 그러한 플레이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윤정환만큼은 못하더라도 그의 개념은 그대로 나머지 선수들에게 녹아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공격-수비-미들이 자연스럽게 공격형으로 전환되고 공간활용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이해부터 보여준 '부천의 유산'은 윤정환과 니폼니쉬 이 둘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1990년대 말의 부천의 아름다운 미들 중시 축구를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윤정환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고, 니포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있었던 목동 경기장의 아름다운 미들플레이들은 부천 팬들, 목동을 찾아준 여러분들에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12. 세레조의 마에스트로 윤정환
한편 윤정환은 세레조 오사카로 팀을 옮긴다. 황선홍과 노정윤이 뛰었던 바로 그 팀이다. 윤정환은 세레조 오사카의 마에스트로로 미들을 지휘하게 된다. 그리고 대형 스타가 없던 팀을 전기리그 2위까지 끌어올렸다.
아쉬운 2위였다. 한경기만 승리를 거뒀다면 전기리그 우승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마지막 한발에서 밀린 경기였다.
2000년 여름 윤정환 팬클럽 모임이 목동에서 열렸을 때 이 점을 직접 물어봤었다
.
"팬들이 뭐라 안하디? 우승 놓쳤는데?"
"아 그런거 없었어, 준우승도 처음인 팀이고 무척 기뻐하고 좋아하더라"
"겪어보니 어디가 더 편해?"
"편하고 말고가 어딨나. 다 열심히 해 봐야지, 어딜 가던간에 선수들은 다 열심히 해, 똑같아"
"아 하지만 선수들 숙소까지 따라오고 불러내는 팬은 없어"
(하하...인천가서 몇번 불러내긴 했으니...^^;; 언제나처럼 굵은 것이 윤정환의 답변)
윤정환은 이때 이 생활을 마음에 들어하는 듯 했다.
하지만 팀의 성적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윤정환을 막기 위해 타 팀들은 세레조 오사카의 마에스트로를 막기 위한 해결책을 똑같이 잡았으며 세레조 오사카도 끝내 윤정환을 도와줄 수 있는 전력영입에 한계가 있던 팀이었다.
하지만 팬의 믿음은 두터웠기에 윤정환은 분명 세레조 오사카의 베스트멤버로 계속 뛰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월드컵이 다가오게 되자 과연 윤정환은 월드컵 대표팀에 뛰게 될 것인가? 아닌가? 그 문제가 다가오게 된다.




덧글
Dataman 2008/03/18 14:54 # 답글
00년 결승전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신의손이 부상당해 나간 다음 진순진이 글러브를 낀 거겠죠. 98-99년 룰과 달리 연장전 없이 바로 PK에 들어가게 하고 엔트리를 16명으로 줄였을 때 각 팀들이 GK는 1명씩만 넣었으니까요. 이 일 터지고 나서 01년부터 17명 엔트리가 되던가요.안양만 직살나게 욕먹었지만 사실 부천도 그 경기에는 예비GK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홍차도둑 2008/03/18 15:25 # 답글
맞아요 그 문제 때문에 부천도 예비 GK 없었습니다. 감독 입장으로선 5명의 예비도 부족한데 어떻게 골키퍼까지 한명 더 넣느냐 하면서 안양 입장을 옹호할 수 밖에 없었죠. 사실 5명 예비에서 필드 4명 + 골키퍼 1명이면 너무 전술 변화의 폭이 좁으니까요.K리그의 황당 에피소드중 하나네요 그러고보니 그 경기는
푸른별빛 2008/03/18 17:36 # 답글
리버풀 아게르를 보면 가끔 홍명보나 이임생 선수가 생각이 나더군요. 히딩크 감독 시절 스리백을 운용했지만 공격 전개시에는 세 명중 어느 한 선수가 위로 올라오면서 미들을 두텁게 해주고, 역습시 좌영포 우종국이 재빨리 내려와서 순간적으로 포백을 만들기도 했구요. 요즘은 수비진이 진짜 수비만 하려고 해서 좀 아쉬웠다는...곽태휘 선수도 골이 있긴 하지만 평소에는 많이 올라오지는 않더군요.
홍차도둑 2008/03/19 00:11 # 답글
말씀하신 그런 움직임이 기본으로 나오던 것이 1999년의 부천이었지요 ^^반면 지금의 스리백은 확실한 수비 위주입니다. 어찌 보자면 안정적인 면에선 1990년대 당시의 1스위프 2스토퍼 방식에 비해 선수들이 확실히 지켜내는 점은 있어요, 수비수들의 백에 대한 개념은 지금이 확실히 업그레이드 된 면이 있습니다 ^^
정상궤도 2009/11/13 21:42 # 삭제 답글
처음 오는데 열심히 쓴 글에 태클걸어서 죄송합니다. 근데 당시 이임생의 콤비는 유상수와 맞트레이드되어서 지에스에서 온 박철인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다시 뭉친 남북단일팀 4강 주역'이라고 해서 강철, 이태홍과 함께 기사에 나왔던 걸 읽은 적이 있거든요.
홍차도둑 2009/11/13 22:26 #
태클이 아니라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1999년까지 유상수는 부천에서 뛰었고 말씀하신대로 2000년에 안양에서 박철과 트레이드 되었습니다.제가 1999년의 그 플레이에는 정말 반해서 놀랐는데 그걸 2000년 이야기하면서 끌고온 서술상에 실수가 있던 것이 맞습니다. ^^
지적하신대로 당시 1991년의 남북한 단일팀의 수비진들이 그대로 올라온게 맞지요 ^^
당시 골키퍼였던 최익형선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허리부상으로 은퇴하지만 말입니다. 이용발선수도 당시 남북 단일팀의 선수였으나 최종 탈락된 선수입니다 ^^
그리고 재미있던건 당시 남북 단일팀 트레이너(팀 닥터)였던 김장렬씨도 당시 부천에 계셨습니다. 완전히 그 팀의 선수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정말 드문 케이스였던 것이지요 ^^
지적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