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발레리 니폼니쉬 부천을 떠나다
1998년은 니포 감독이 부천을 떠난 해였다.
그해 가을에 만났을 때 니포 감독은
"너무 고향을 오래 떠나 있었다"라며 나에게 은근한 사임의 뜻을 표한바 있었다.
"감독님, 팬들은 당신이 더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지만 그는 웃을 뿐이었다.
5년이나 되는 세월, 그동안 떠나있던 고국으로 가고 다른 팀으로 가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쓸쓸함과 허전함이 들어있었다.
한때 사석에서 "내가 돈이 있으면 구단주가 되서 프로스포츠가 뭔지 보여주고 싶다"는 말까지 했었지만. 그의 꿈은 꿈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산프레체 히로시마, 중국등의 프로팀을 옮겨다니나. 그리 큰 성적을 내지는 못하고 만다.
1990년 월드컵의 카메룬 돌풍은 그가 낸 가장 자랑스러운 성적이겠지만 그 이후 큰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2002년 월드컵 감독으로도 거론되었지만 축구협회는 단호히 "그는 한국에서 실패한 감독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감독 후보군에서 제외시킨다.
그 평가에 대해서 니폼니쉬 팬으로서는 불끈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일단 그는 선수들 관리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인자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설파한다 하더라도 그 부분은 한계가 있다.
한국의 선수자원이 넘쳐나지 않는 이상 이미 프로까지 온 사람들은 나름대로 초-중-고때에 이미 엘리트로 인정받은 선수들이다. 그리고 당장 그 선수들을 배재하면 일어나는 것은 엔트리 부족->경기력 저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선수들에게 채찍을 거의 들지 않았으며, 코치들의 강압적인 관리를 막았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에 맞기자는 것이었다. 프로까지 올라온 이상 선수가 자기 관리는 할수 있을 것이라고...그 결과 나온것은 선수들의 자기관리 실패의 면도 분명 있었다.
(그래서 두번째 해 부터는 동계훈련 전의 휴식기때 자기개발 메뉴를 하나씩 던져줬다지만, 그 성과의 미미함은 다음해 성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니폼니쉬 아래서 자신의 스타일을 완벽히 변화시켜 뛰어난 수비수로 재탄생한 이임생이라는 모델도 있지만 결국 미완의 대기로 끝난 선수도 있었다.
또한 윤정환의 경우도 부천에서 1996년 이후는 제 컨디션으로 뛰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의 해법을 제시하지못했다. 그런 결점을 생각하자면 2002년에 니폼니쉬가 감독 후보군에서 탈락하고 히딩크가 선정된 것은 옳은 결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긍정적인 면은 긍정적인 면이지만 평가는 냉혹해야 할 필요는 있다. 팬으로서 난 니폼니쉬를 좋아하고 숭배하지만 돈을 걸어야 하는 도박적인 면에서 평가한다면 다르게 봐야 할 필요는 있는것이다.
여하튼 니폼니쉬 감독은 가고 조윤환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했다.
선수들로선 긴장의 해인 1999년이 시작되었다.
10. 1999 윤정환의 부천 마지막 해
1998년 부천의 공격 축은 곽경근이었다. 1991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대회의 멤버들 중 많은 선수들이 이로서 부천에 몰려들게 된다. 수비의 이임생-강철-박철 골키퍼 최익형, 이용발 거기에 당시 주장이었던 이태홍, 그리고 최전방 스트라이커 곽경근까지.
곽경은은 포스트플레이어로서 이원식과 같이 1970년대 유럽을 쓸어버렸던 리버풀의 존 토샥-캐빈 키건이라는 빅&스몰 조합을 이루면서 98년의 부천 공격의 주가 되었지만 보조전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힘들었다. 부천은 여러 용병을 테스트하며 어떡하던 공격력을 배가시키려 하지만 괜찮은 용병을 영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96년 즈음 하여 '우승청부사'로 불린 샤샤(부산,수원,성남에서 활약한 그 스트라이커 샤샤 맞다)가 한때 부천에 오려고 하긴 했지만(선수 본인은 상당히 적극적인 반응이었단다) 이놈의 몸값 문제 때문에 결국 영입되지 못했다.
(부천의 용병 영입중 1996년 세르게이 이후 가장 성공적인 영입이라면 2001쯤에 오게 되는 비탈리와 다보였다. 비탈리는 전북에서 맹활약한 포워드로 골 감각도 좋았지만 김도훈에게 찬스를 내 주는 능력이 더 뛰어난 스트라이커였다. 전형적인 투톱 체질의 스트라이커였다. 다보 하면 그 순진한 웃음이 인상에 남는 용병이었다. 늘 경기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스트라이커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내 농담도 잘 받아주곤 했는데...'좀더 골 넣어보지?' 하면 '걱정마슈, 후반기는 전반기보다 한골이라도 더 넣을테니, 그럼 되는거지?' 하고 농담하던 얼굴이 선하다)
결국 부천 코치진이 택한 카드는 고려대를 졸업하는 이성재였다.
당시 하이텔에서 조승옥님이 올린 글에 따르면.
'골감각이 부족하긴 하지만 스피드와 돌파력은 좋다. 부천같은 강한 미드필더진을 가지고 있는 팀의 뒷받침이 있다면 충분히 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라는 평이 있었다. 그 말대로 이성재는 1순위로 부천에 지명. 입단하게 된다.
부천으로선 다시금 스피드메이커를 2명을 갖추게 되는 이른바 '전반 이성재-후반 이원식'이라는 2000년의 '필승공식'을 이제 첫 가동하는 해가 된다.
이러한 스피드 있는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여 돌파하는 방식은 한국축구의 전통적인 스트라이커 조합이기도 했다. 1970년대 말의 김재한, 1980년대의 최순호가 나오기 전에는 신장차이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스피드를 극대화한 조합이 부천 코치진이 내 놓은 해법이었다.
이 해법은 성공했다. 윤정환은 미들에서 역시 전통적인 플레이메이커로 나섰다.
여기서 큰 힘이 된 것은 이을용이었다. 김기동이 전통적인 수비미들 바로 밑 부분의 앵커맨으로서의 활동폭은 완성단계에 있었다. 아니 이젠 지금 포항에서 보여주는 때로는 전진하기도 하는 등의 넓은 미드필드 운용도 엿볼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을용은 윤정환의 앞에서 공격 돌파와 1선 수비를 맡았다. 이들 셋이 윤정환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돌아가는 미들 운영은 1996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1996년은 윤정환을 중심으로 한 공격적인 운영이었다면 이해는 공격과 미들의 안정적인 운영에 중심을 둔 운영이었다.
그 결과는 리그 초반 5연승 등의 정규리그 18승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부산에게 덜미를 잡혀 리그성적은 최종 3위로 마무리 된다. 팬들은 '포스트 니포축구'를 보면서 니포축구의 유산을 만끽했다. 니폼니쉬는 떠났지만 윤정환을 중심으로 추구하는 부천의 미들축구는 살아있었음에 놀랐으며 윤정환이 보여주는 빠른 패스연결과 그에 따른 공간활용은 목동을 찾은 관중들을 놀라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대차로 이긴 경기는 거의 없었지만(대신 대패를 한경기는 꽤 많다. 그래서 99시즌 부천의 대한화재,바이코리아(정규리그),아이다스컵의 총 기록은 59득점 55실점이다) 승부를 낼땐 확실히 냈다. 윤정환의 적극적인 수비 모습을 자주 볼수 있던 것도 이해다.
본인이 했던 말 대로 '난 빠른 선수가 좋다'라고 했던 말처럼 상대 수비의 뒷공간 이용을 확실히 보여주었던 해가 이 해다.
정말 기술 부족한 이성재 선수에게 완빵 찬스가 쑥쑥 나오고 뻥뻥 뚤어버리는 멋진 공간활용이 매 경기 2회 이상씩 나오던 해가 바로 이 해였다. 결국 이성재는 두자리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신인왕으로 올라선다. 이성재의 프로리그 기록 중 최고기록 나온 것이 바로 이해. 결국 이성재-이원식이라는 순발력있는 투톱은 윤정환이라는 마에스트로가 있었음에 가능했던 조합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1999년 겨울 윤정환은 부천팀을 떠났다.




덧글
푸른별빛 2008/03/19 09:43 # 답글
다보~! 저 다보 정말 좋아했는데! 다보 선수가 말리 국가대표 출신이었던가요...그 뒤에 프랑스던가 어디론가 진출했던 것 같기도 하구요. 이성재는 처음에 스탯이나 평가를 봐서는 그닥...일 것 같았는데 만개하더군요. 그래서 축구가 재미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때의 이성재는 단점이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지만 받혀주는 미들진에 의해 장점이 더 부각되었죠.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이 때 부천에서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이원식 선수의 골 세레모니였던;;;; 뭔가 하려고 하는데 하나같이 어색해서 보는 제가 민망하더군요 ㅎㅎ
홍차도둑 2008/03/20 13:41 # 답글
이원식선수는 골 세레모니 계속 만들어서 하던 선수였죠 서포터들하고 무지 친해서 서포터들이 '담엔 이것좀 해 봐요!' 하고 그랬던 것이 그 이유였으니까요 ^^
미스트 2008/03/23 00:44 # 답글
2005년 상암에서 부천의 경기를 봤었는데, 부천의 일부 서포터들이 상대팀으로 이적했던 이원식콜을 계속 했었던게 그런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나보군요. 당시에 "쟤넨 왜 저래요?" 하고 아는 부천팬에게 물었더니 "미친놈들이라 그래"하고 그분이 대답했었는데;;.(모임끼리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았거든요. 경기 끝나고 자기들끼리 좀 다툼이 있더라는;;. 서포터들의 세계는 참 미묘해요.
홍차도둑 2008/03/23 03:08 # 답글
하지만 전 솔직히 말하자면 이원식선수에겐 그 상황에서 욕 못합니다.그 당시 이원식 선수 부인이 엄청 아파서 입원비 등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구...여러가지 이유가 있어요.
다른건 몰라도 부인 치료비 때문에 돈 더 많이 주는 구단으로 옮겼다고 하면...자기가 당하는 입장에선 얼마나 그렇겠습니까.
선수들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볼 때 가장 섭섭할 때가 그런 때라고 그래요.
여러 이유가 있어서 옮긴거고 나름대로 정들었다 생각했는데 '자기가 응원하는 구단 선수가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욕을 할 때 충격받은 선수 몇 있었습니다. 참 안타깝죠...꼭 팀에 대한 충성이 무조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그 사람들의 가치에서 '내가응원하는 축구팀'이 가장 위이기 때문에 생긴 거라면 할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