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팀 밸런스와 감독의 특성이란...
1998시즌을 이야기 하기 전에 '감독의 특성'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할것 같다.
팀을 강화시킨다(팀이 아니라 다른 단어를 넣어도 좋을 것이다).는 명제를 실현하기 위해선 크게 두가지 방안중 하나를 쓰게 된다.
'강점을 더더욱 강하게 살릴 것이냐'
'약점을 보강할 것이냐'
이 두가지 방안은 '팀이 강해진다'는 최종목표는 똑같지만 실행방법이 다르다.
또한 그에 따르는 여러가지가 달라진다. 어쨌건 둘 다 최종목표는 '팀의 강화'에있다.
1996년부터 비견되는 것이 바로 니폼니쉬와 차범근 두 감독의 행보다.
이 둘은 어찌 보자면 상반된 두 입장의 대표주자라 할수 있다.
니폼니쉬 감독의 특성은 '강점을 살리는' 방향이었고 차범근 감독의 경우는 '약점보강'이라는 것에 있었다.
이점은 두 감독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와 성격에 기인한다.
이걸 놓고 니폼니쉬는 '개방적', 차범근은 '폐쇠적'이라는 등등의 극단적인 표현은 쓰지 않았으면 한다. 이러한 것은 공-사적으로 다른 입장도 있는지라 평소 성격과 팀을 이끌어가는 '수장'이라는 입장에서 나오는 지휘는 다를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많은 분야에서 수많은 예시가 있다. 다만 내가 말하는 '성격' 이라는 것은 팀을 이끌고 나갈 때 '어떠한 방향'으로 가는게 심리적인 안정이 되더라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다.(이건 감독뿐 아니라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니폼니쉬는 윤정환이라는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해서 팀의 공격력을 높이는 방안을 생각하고 그것을 극대화시킨 것이 1995-1996 시즌이었고 윤정환의 활약 중 베스트트랙들이 이 시기에 몰려있는 것은 그 '극대화'를 실현한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차범근은 2-6의 참패로 박종환 감독이 물러난 상황에서 여론까지 악화되었을 때에 '여론 무마용'으로 등장한 면도 무시할 수 없는 감독이다. 차범근 감독에게 있어선 당장 앞에 놓인 월드컵예선을 통과 못하면 그야말로 끝장인 상황이었다. 이때 차범근감독은 팀의 리빌딩을 수비 위주로 짰고 그것을 실행한다. 물론 운도 많이 따랐다. 공격력 극대화쪽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닌 튼실한 수비를 우선시했으며 그 리빌딩은 절반 이상의 성공을 가져왔지만 끝내 해결하지 못한 부분도 없진 않았다.
솔직히 이때 한국은 일본-UAE-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과 한조를 이뤘지만 반대편조는 이란-사우디-쿠웨이트 라는 호랑이들이 득시글댄 조였다. 만약 중국 대신에 반대편조로 갔다면 한국의 월드컵 진출이 그만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설하고 윤정환의 부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윤정환이라는 플레이어가 아무리 파괴력이 좋다 하더라도 혼자서만은 모든걸 이뤄낼 수는 없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것이며 아무리 팀 전술의 핵심이 한 플레이메이커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피우는 것은 나머지 10명의 몫이며 이러한 부분을 조합해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감독의 몫이다.
막말로 말해서 그 한명을 보강할 방법이 없다면 그 선수를 빼고 애초부터 전략전술의 수정까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감독의 일이다.
이런 면에서 니폼니쉬 감독은 윤정환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팀 빌딩의 방향은 바뀌었다. 아마 이때부터 조윤환코치의 입김이 세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1997년 막판에 조코치와 니포감독이 '내일 어떤 선수를 내세울까'를 놓고 경기 전날 스쿼드를 짤 때 늘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부상선수가 너무 많다보니 내세울만한 선수가 너무 뻔해서'였다...그만큼 선수들이 부족했던 것이 이해이기도 했다.
1995-1996시즌 부천의 공격축구가 빛났던 이유는 팀의 주포가 '세르게이-조정현'이라는 투 스트라이커가 고정되어 있기도 했지만. 보조 공격수들의 활약도 무시못할 정도였다.
1996년은 초반에 이원식과 세르게이의 활약이 불을 뿜자 타 팀은 이 둘을 막는데 주력한다. 그러자마자 또 불을 뿜은 것은 권태규의 연속골, 그러다 권태규를 신경쓰면 이번엔 윤정춘, 거기에 김윤근까지 가세해(전부 2경기 이상의 연속골을 기록한 선수들만 적은 것이다) 윤정환의 공격선택권을 넓혀줬을 뿐 아니라 상대 수비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효과까지 만들어 버린게 바로 이 두 시즌이다.
아무리 파괴적인 라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라인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선 보조라인의 활발한 성적도 중요하다.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상대의 공격라인이 다채로와지면 자꾸 주의력이 분산되게 되고 그만큼 실수하거나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커진다. 그러다보니 상대를 화려하게 KO시키는 팀이나 선수들의 경우는 주포(또는 이른바 '필살기' 들)를 아끼거나 꼭 필요할 때만 쓴다던가. 아니면 알면서도 당할수 밖에 없는 상황을 종종 연출해낸다. 1997 시즌 부천은 바로 이러한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윤정환 혼자서는 이러한 전환을 할 수가 없었다.
이해 중요한 일이라면 2시즌 정도 동안에 출전못하는 미드필더들이 몇 출전한다.
그중 한명이 남기일이다. 그동안 미드필드진에 올인하긴 했지만 유망주들이기만 했지 정작 출전못하던 선수들이 출전하게 되는데, 이 2-3년간 니포축구의 특징을 익히고 견실히 실행해 왔던 선수들의 대거 등장이었다. 이것은 향후 부천팀의 팀 컬러가 200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부천 미드필드진은 1995년 이후 또다른 격전을 치루게 된다.
8. 이을용의 영입. 그리고 대격전을 치루는 미드필드
1998시즌 이을용의 영입. 이미 아마추어팀에서 있던 선수임에도 과감히 이을용을 드래프트에서 뽑은 것은 팀 운영에 있어 하나의 전환이기도 했다.
미드필드의 운용을 공격적으로 가져가다 패한 부분을 넘어서 부천의 미드필드는 수비도 신경쓰는 쪽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전 4-3-3의 포멧을 그대로 운영하는데 있어 윤정환은 프리였지만 이제 한단계 내려오게 된다. 본격적인 플레이메이커나 다름없는 위치로 이동했으며 그 뒤를 이을용-김기동이 받치는 식으로 포진한다. 조셉이 있을 때 조셉이 공-수를 넘나들며 하던 일을 이제 이을용-김기동이 둘이 동시에 하게 된다. 이때 나온 이들의 미들에서의 운영은 이미 완성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김기동이 이전까지 수비 위주의 선수였다면 중거리 슈팅과 이런저런 패스 시도로 공격의 물줄기를 또 다르게 잡아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해부터이기도 하다.
이것은 윤정환의 부담을 줄여주면서 팀 운영의 극대화를 하기 위한 코칭스텝의 노력이었으며 분명 이 부분은 뛰어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해부터 부천의 명운은 그 옛날 유공시절로 돌아가고 만다.
뛰어난 최 전방 공격수의 부재. 이 부분은 부천의 경기 운영 자체를 이상하게 만들고 만다. 세르게이 부르빈의 전열이탈은 그야말로 본인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내가 사석에서 '인천 옐로우하우스의 차르' 라는 말까지 거침없이 하게 만든 그의 사생활은 결국 그를 고향 앞으로 하게 만들었으며 그 대신 들어온 여러 공격수들은 부천의 득점 기회를 있는대로 까먹었다. 이렇게 경기를 몰아붙이다가 역습에 휘말려 당한 것이 부천의 경기패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었다.
하지만 또다른 문제는 바로 팀 내에서 주전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대격전이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 부천 선수였던 한 선수의 회고를 그대로 들어보자.
"우리야 연습경기가 실전보다 더 치열했고 경기 밀도가 높았어요, 아시잖아요 가끔가다 오셔서 보시기도 했으니, 우리도 연습경기가 더 재미있었을 정도니까"
듣기만 하면 좋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에서 엄청난 반대 이면을 볼 수 있다.
연습경기에서의 주전확보 때문에 엄청난 밀도높은 경기는 결국 선수들의 오버페이스를 가져온 면도 있었고 사실 강력한 스트라이커를 가지고 있는 팀이 아니었던지라 연습경기를 통해 그러한 스트라이커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미드필드의 3-4자리를 놓고 선수들은 엄청난 경쟁을 펼쳤다.
한자리가 윤정환-김기동의 자리라면 나머지 한자리를 놓고 이을용이 거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해도 남기일이라는 최전방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공격형 미드필드 그것도 몸싸움을 어느정도 해내는 미드필더가 있다는 것 때문에 팀 구성은 더더욱 강력해졌으며 4-4-2에 가까운 '다이아몬드 대형'의 미드필드진 구성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해였다.
부천 미드필드들의 움직임은 이후 윤정환이 떠난 뒤에도 안정적으로 돌아가면서 팀 공격을 주도하는데 그 기반이 닦여진 해가 바로 이 해라 할 수 있다.
니폼니쉬의 마지막 해가 되는 1998시즌은 부천이 향후 보여주는 미드필드 플레이를 완성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며 김기동의 포항 이적 전까지는 이 유산을 바탕으로 지내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정확히는 갉아먹으면서 지냈지...후우~)
하지만 부천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물론 꼴찌를 차지한 1997 시즌보다는 나았고 팀의 희망은 보였다.
여기서 꼭 적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아마도 K리그 사상 성적부진에도 감독이 짤리지 않고 그리고 팬들조차도 감독보다는 구단을 욕해댄 것이 1997 시즌의 부천이었다. 부천 팬들은 니포 감독의 인품을 알고 있었으며 부천의 부진을 구단 프런트의 무능(정확히는 대형 스트라이커의 영입없음)을 두고 비난하였으며 이러한 비난과 대립의 연장선상에 서포터와 구단의 충돌은 계속되었던 것이며, 이것은 결국 1998 시즌이 끝난 뒤 서포터들의 대거 항의가 일어난다.
(이렇게 계속 부진했으니 감독 짤라라 가 아니라 구단의 운영 자체에 대한 질문이었으며 되로 '니포같은 좋은 감독을 보좌해 주지 못할 망정 뭐하는거냐?' 라는 것도 구단에 대한 항의이유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말 다했지 뭐...여기서도 '니포 못된놈' 이딴 소리는 하나도 안나왔다. 그만큼 팬들에게 사랑받고 신임받았던 감독이다.)
이러한 미드필드에서의 격전은 윤정환을 중심으로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는데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최소한 '공격적인 면에서의 교본'이 된 것은 윤정환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김기동-이을용에게 있어 '패스가 좋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이들는 패스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들의 패스는 뻔히 보이고 읽히는 패스였고 빈 공간을 찾아내는 능력이 좋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패스를 더 늘린 것은 바로 윤정환의 공간 찾아내기 능력이기도 했다.
윤정환의 경우 본인 스스로는 '나는 발 빠른 공격수가 좋다' 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
그 이유는 '패스를 약간 길게 하더라도 따라가서 받을 수 있으니까'였고 '왜 패스를 길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윤정환의 답은 이거였다.
"딱 봤을 때 어떤 자리에 수비보다 빨리 들어갈 수 있다면 잡을 수 있는 빈 공간이 보이거든, 그때 조금 세게 빨리 차야 하는데 그 공을 따라잡아 줄수 있는 선수가 있음 나도 패스할 곳이 더 많아지니까 좋지"
이러한 점은 곧바로 김기동-이을용에게 전해졌으며 이 둘은 점점 롱패스 말고도 쇼트패스로 짧게 짧게 상대를 조여들어가는 방법까지 시도해 가는 등 부천 미드필드진의 업그레이드는 또 한단계 올라섰다.
윤정환은 그때까지 2차원적으로 생각하던 선수들과는 달리 4차원적으로 경기장을 볼 줄 알았다. 단순한 방향만 정하는 2차원적 패스가 아닌 높이에 맞춰줄주도 아는 3차원적인 플레이가 아니라 시간까지 생각해서 경합을 붙이기도 하고 그 뒤에 다른 선수들이 움직였을 때 리턴 받는다던가 2파 공격선으로 공을 올리기도 하는 등의 4차원적인 사고를 가지고 패싱 방향과 자신의 움직임을 결정하던 선수였다. 이것이 그를 호평하는 감독들이 일제히 소리높이는 '그의 행동은 당위성을 가지고 있고, 경기에서 알아서 자신이 필요한 위치에 가 있다' 라는 말을 하게끔 한 것이다.
이런 성향의 플레이에서 필수적인 것은 강력한 스트라이커였다. 그렇게 패스를 넣었을 때 공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골을 결정지어주던지 아니면 다시 리턴, 또는 크로스를 올릴수도 있는 공격수가 최소 한명은 더 필요했다.
이원식의 발빠른 것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부천은 세르게이, 권태규의 전력 이탈 이후 최 전방에서 이러한 일을 해 줄 자원이 없었다.
미드필드의 운영능력은 이미 극대화 되었으며 아는 사람들끼리는 '대표팀에서 이 4명을 동시에 봤으면 좋겠다' 라고 할 정도로 미들의 밸런스는 뛰어났다. 이 밸런스를 가지고 시즌 초반 아디다스컵 결승까지 올라가면서 타 팀을 압도해 버렸으며 미들 운영에서는 시즌 내내 짜임새 있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골의 부재, 그것은 팀을 상위권과 우승에서 멀어지게 만든 원인이었다.
그래서 부천이 찾은 해법은 197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축구에서 사용한 '모범답안' 이었다.
(다음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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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도 이제 점점 마지막으로 가고 있습니다. 1998-1999시즌 이야기가 끝나면 2002 월드컵이야기는 짧게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 한회 정도가 될거 같군요, 그럼 글이 한 3개 정도 남은 것일까요?
주말 내에 마무리 지어보도록 하겠습니다만...일단 많이 써 보고 보겠습니다.
윤정환 한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부천팀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합니다. 윤정환 개인과 맺은 약속도 있고 해서 너무 개인사적인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해요...
오랫만에 쓰는 축구에 대한 진득한 글인지라 글이 점점 길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본 부천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니폼니쉬 시대에 대한 추억이랄까...
하여간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신거 같으니 계속해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덧글
미스트 2008/03/15 10:56 # 답글
무척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 저에게 90년대의 축구는 수원 창단 이후 tv로만 관전하던 게 전부였기에, 이렇게 직접 시대를 겪으신 분의 이야기가 반갑고, 새롭고, 신기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Dataman 2008/03/15 19:47 # 답글
'옛 부천 선수의 회고'를 보면 니폼니시에 대한 생각을 한가지 수정할 수밖에 없는데, 가뜩이나 얄팍하게 돌아가던 팀을 관리할 능력이 부재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리 되면 부천을 떠난 이후 맡은 팀들의 실적이 그다지 괜찮은 게 없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만.
比良坂初音 2008/03/15 23:27 # 답글
윤정환이 한 2배정도만 더 파워가 좋았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쓰읍;;
홍차도둑 2008/03/16 02:22 # 답글
미스트님...감사합니다 ^^ 그때의 기억이라는 것이 좀 그렇습니다만 ^^낙원님...관리능력이 떨어진 부분은 있습니다. 분명. 사실 니폼니쉬 감독 시절 가장 실패한 부분이 선수관리 문제가 있습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하츠네님...나름대로 노력한다고는 했지만...참 그러한 스펙은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부분이거든요...젝일이죠 뭐
푸른별빛 2008/03/18 17:37 # 답글
이 때쯤 곽경근 선수가 오지 않았던가요? 곽경근 선수를 생각하면 왠지 트리플J의 전신같은 느낌이 들어요...켁
홍차도둑 2008/03/19 00:14 # 답글
^^ 다음글에 곽경근선수 이야기 있습니다 ^^여담으로 곽경근 선수에 대한 일화 하나.
1998년에 하이텔 축구동에서 가을철 체육대회를 월드컵 지역예선 끝나고 했는데...
그때 불쑥 나타나더라구요. 근처 친척집에 일이 있어서 왔는데 지나가다보니 부천 유니폼 입고 있는 사람들 있고 해서 뭔일이지? 하고 왔다가 잡혀서 노래 한곡 부르고 가고 그랬었답니다 ^^
잡혔는데 약간은 무리한 부탁이지만 선수 본인도 기분좋게 하다 가고 그랫지요, 재미있는 때였지만, 그만큼 서포터에 대한 기분좋음이 부천 선수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
ls 2009/07/12 08:50 # 삭제 답글
검색 해서 글을 읽고 많이 동감하는 한 1人입니다관련직에 종사 하셨나요? 아무튼 글이 상당히 현실적이네요
제가 부천에 살아서 당연히 부천 유공 SK를 응원했었고.... 지금은 프로축구 거의 안보고 살지요 이상 생략하고
아무튼 그땐 거의 생각 없이 축구를 봤지요 그러다 축구의 한재미를 느끼게 해준 것이 플레이메이커라는
특정 포지션이고 한때 한국축구의 딜레마로 떠오르 때였던것 같네요 윤정환 고종수 이관우,,,
아마 부천은 98 99 저때가 황금기 였던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을용 김기동 윤정환 윤정춘등 정말 부천은 미들이 강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부천이지만 경기장은 목동에 있어서
목동가서 보고 티비에 나왔다고 좋아했던 그때가 있었는데..
정작 부천에 홈구장이 생기고는,,, 할말이 없네요
제가 한창 볼 때 부천은 강철 이임생도 있었고 곽경근 그리고 해결사 이원식 캬,,,
홍차도둑 2009/07/12 11:41 #
한국일보에서도 관련직에 종사했었습니다. 1995-6년에 목동에 오셨다면 서포터들 맨앞에서 북을 치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