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995년은 준비기였다.
1995년은 유공으로선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을 아로새긴 유공의 멤버들은 이 해를 기점으로 은퇴를 한다.
'캐논 슈터' 황보 관을 필두로 김상진(잘 모르시겠지만 대학때만 해도 김주성하고 맞짱뜬다는 평가 받은 분이다. 부상으로 1996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셨다.), 이광종(수원으로 이적)등이 팀을 나갔다. 용병도 헝가리의 조셉(유공팀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윤정환의 선수 생활의 초반은 조셉 이야기가 다수를 차지할 것이다)과 골키퍼 알렉세이 포드쉬발로프(한국 등록명 '샤샤' 원래는 '사샤'라고 해야 한다. 러시아에서 '알렉세이'라는 이름의 애칭은 '사샤'로 줄이기에 붙인 이름이다. 슬라브어계에선 흔한 이름인지라 그래서 한국 프로축구 용병사에서 '동구권시대'에는 샤샤라는 선수가 유독 많다. 아 그리고 이 선수는 7번째 야신 클럽 멤버가 될 뻔 한 선수다. 기준기록은 통과했지만 그 기록을 통과한 해에 소련 최고리그가 해체됨에 따라 야신클럽 멤버는 6명으로 그쳤다. 최후의 야신클럽 멤버가 바로 발레리 사리체프, 한국 귀하명 '신의손' 되시겠다.)를 제외하곤 다 내보냈다.
'귀공자'로 불린 김진형(키 180대 초반이지만 정식 농구골대에서 덩크슛을 꽂아넣는 엄청난 점프력을 자랑한 분이시다)도 이때를 기점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새로운 피들이 속속 그라운드를 채운다. 수비에서는 허기태가 은퇴하고 손종찬, 김상문, 송선호등의 선수가 은퇴한다. 그중 공격수였던 이찬행은 수비수로 돌아서 1996-1996년 사이에 이임생과 같이 수비라인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1996년을 전후해서 신인 수비수들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그 자리를 메꾸면서 지역방어를 완성한 선수가 바로 유상수-김한윤이다.
공격에서는 '보헤미안 테크니션' 권태규(솔직히 1990년대 후반 부천유공에서 최고의 테크니션을 꼽으라면 최문식 입단 이전엔 권태규다. 이 선수도 보헤미안 기질로 결국은 일찍 은퇴했지만 1996 올림픽 멤버에도 들어가는 등 실력은 좋았다), 김윤근 등이 있었고, 윤정환의 짝이라 할수 있는 이원식도 이 무렵해서 들어오게 된다.
최고의 격전지는 미드필드였다.
당시 부천 프런트는 대놓고 "우리는 미드필더들의 영입에 올인한다" 라고 했을 정도로 튼실한 선수들이 많았다. 윤정환도 그 중 하나였지만 포항에서 있던 김기동을 데려온 것을 필두로 남기일, 백승우, 박효빈, 윤정춘 등이 기존 선수들을 확실히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 1995년이었고 팀 정비는 1996년에 일차로 마무리 되어 이른바 '부천 미드필드의 황금시대'를 연 '목동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만 하더라도 윤정환은 최전방 공격수를 하기도 하고 미드필드를 하기도 하는 등 포지션이 고정화되지 못했다. 이것은 그때그때마다 팀 사정에 맞추기도했지만 그의 능력이 단순한 '플레이메이커'에 고정되고 있지 않았음이다.
'플레이메이커' 운운할 때 윤정환을 든다면 글쎄 뭐랄까...틀린말은 아니지만 그의 진면목을 다 쓰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때론 공격첨병에 서서 상대팀 골을 맹폭한 윤정환...느낌이 잘 안오시겠지만 1995시즌 윤정환은 최전방에도 섰다.
아 그리고 보너스트랙 하나.
1995 시즌 윤정환의 등번호는 몇번이었을까?
답은 8,9,10번이다.
1994, 1995 시즌은 고유 등번호가 아닌 가변 등번호로 경기때마다 선수들의 등번호가 달라졌다. 스타팅멤버는 무조건 1-11번이어야 했으며 16번은 교체골키퍼, 13번부터 자유등번호였다. 최전방 공격수는 무조건 9,10,11번만 달아야 했던 때다. 때문에 윤정환은 이 시즌 고정된 등번호가 없었다. 9,10번일 때엔 최전방에 섰던 날이다. 궁금하면 기록 뒤져보시라~
4. 목동시대의 개막
1996년은 이른바 '동대문 3개 구단 홈' 시대의 종말을 알린 해가 된다. 이때는 영화관처럼 '동시상영'으로 동대문에서 2경기가 같은 날 시간차로 벌어지기도 했었는데 프로축구연맹의 '서울 공동연고지'뒤 '서울을 연고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으로 유공, LG, 일화는 각각의 연고지를 부천, 안양, 천안으로 결정하고 동대문을 비우게 된다.
그래도 완전히 버릴수는 없었던지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서 이른바 '중립경기'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윤정환은 생일날 대전하고 중립경기를 치룬다. 이 경기에서 0-2로 뒤지다가 5분동안 원맨쇼를 펼쳐 2-2를 만들어 버리는 만행도 벌였다. 그 경기가 이 '중립지역 경기'였다. 요상하게도 이게 프로연맹 기록에서 빠져 있다) 이것을 끝으로 동대문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 3개구단 중 그래도 동대문이 아닌 목동시대를 연 부천유공(이라지만 홈경기는 2000년까지 목동에서 치룬다)은 윤정환을 중심으로 미들-공격진이 완성되게 된다.
이해 부천유공의 베스트는 다음과 같다
GK 샤샤
DF 김진형-허기태(이임생-알렉셰이), 김은철-유상수-박효빈(?)
MF 김기동-조셉-윤정환
FW 윤정춘(?)-세르게이-(이원식,권태규,김윤근, 이석경, 차상해, 조정현 등이 그때그때 한자리를 맡았음)
4-3-3 진형
김진형-허기태-알렉세이 이 셋이 중앙수비수를 봤다. 이때가 김진형 선수가 수비와 미들을 오가다가 결국 은퇴하게 된다(사실 김진형 선수도 대단한 선수로 한때 홍명보-조민국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선수이기도 하다)
공격에선 세르게이와 윤정춘이 축으로 섰다. 위에 베스트에서 (?)로 표시된 선수는 포지션에서 이론의 여지가 있는 선수들이다 흔히 윤정춘선수를 미들로 놓고 말하는 분들도 많지만 의외로 윤정춘선수는 공격수였다. 그 당시 무조건 팀 전형을 4-4-2로 통일시켜서 쓰던 언론의 무조건적인 4-4-2 틀의 폐혜다.
(위의 부천 전형이 4-3-3인 것을 내가 임의로 썼다고 생각하지 마라. 위의 베스트진형은 니폼니쉬 감독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부천의 황금시대'라 할수 있는 '목동시대'가 열린다.
그 금자탑이자 유일한 우승컵인 아디다스컵을 이해 우승한다.
그러면서 팀 공격의 키는 윤정춘이 맡게 된다.
아니 그럼 윤정환은 무엇을 했느냐고?
일단 윤정환은 이해 본격적으로 뛴 것은 아디다스컵 외엔 정규리그는 8월에야 합류하게 된다 올림픽 때문이었다. 올림픽 본선에서 윤정환은 런던 올림픽 멕시코전 이후 48년만에 대한민국에 1승을 안기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킨다. 그 때문에 정규리그는 8월17일 광양에서 열린 원정경기에 처음 참가하게 된다.
그걸 떠나서 부천 유공팀에서 윤정환이 맡은 역할은 무었이었을까?
정답은 '프리맨' 그 자체였다.
윤정환에게 별도의 포지션을 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한신뢰, '니 맘대로 하고 싶은거 다 해라'가 윤정환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대신 횡하니 비어버린 미들은 김기동과 조셉 둘에게 맡겨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까지 플레이메이커의 역할을 맡았던 조셉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이동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김기동은?
뭐랄까...완전 마당쇠라 생각하시면 된다. 김기동선수에겐 미안하지만 김기동선수가 이해 보면 거의 수비수이셨걸랑...사실상 미들이라기 보다는 앵커맨에 가까운 수비보다 앞선에서의 커트맨 역할이 많으셨다. 조셉은 수비와 공격을 넘나들었고 윤정환은 '프리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위에 말한 4-3-3은 때론 4-2-4로 변형되기도 하고 심할땐 미들을 김기동 한명에게 맡겨놓고 공격 가담해 들어가는 극단적인 상황도 연출한다. 이때 김기동선수의 엄청난 운동량이 아니었으면 부천 미들플레이 못했다. 문제는 그 부담 때문에 상대의 역습을 너무 자주 허용하고 수비도 뻥꾸난 것이 팀 밸런스의 문제로 다가온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윤정환 개인에게 닥친것은 집중적인 견제였다.




덧글
푸른별빛 2008/03/13 16:05 # 답글
우와...전 이 때 윤정환 밖에 안봐서 잘 몰랐었는데 저랬군요. 윤정환 선수가 미친 듯이 올라가면 윤정춘이나 세르게이 선수가 아래로 내려와서 "어? 공격수는 무조건 올라가야 되는거 아냐?" 이런 생각도 했었던...경기장 가서 봤을 때는 윤정환 선수도 덜덜덜이었지만 김기동 선수가 정말 돋보이더군요. 공 가진 선수들을 커트 커트...어떤 경기였는지 기억안나는데 공격4 Vs 김기동 & 센터백2 상황에서 김기동 선수가 연속 태클 두방으로 공 걷어내니까 공격수들이 전부 머리를 감싸 쥐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Dataman 2008/03/13 17:28 # 답글
사소한 거지만 부천은 00년까지 목동에 있었죠. 이걸 기억하는 건 00년 결승전이 부천-안양이었기 때문입니다.뒤를 이어서 01년에 홈구장 잔디공사로 인해 안양이 목동을 쓰게 되죠.
홍차도둑 2008/03/13 17:34 # 답글
푸른볓빛님...맞습니다. 그때 김기동선수에 대해 부천 프천트는 이런 말 하기도 했죠 "우리팀은 기동이 없으면 경기 못해요"Dataman...악! 온라인에서 두들기다보니 나온 실수...부천운동장 개장경기 취재를 2001년에 갔는데 착각했음 T_T
홍차도둑 2008/03/13 18:24 # 답글
푸른별빛님...말씀하신 것 중 윤정환이 올라갈 때 윤정춘, 세르게이가 약간 내려오는 것은 뭐랄까...요즘 스타에서 보면 뮤탈리스크로 먼저 들어갔다가 컨트롤 하면서 뒤에 대기중인 뮤탈이 다시 들어가고 먼저 들어갔던 뮤탈 빼내면서 체력회복시키는거 있죠? 그러다가 체력회복되면 다시 돌진, 들어갔던 것은 다시 빠져나가는 그런 컨트롤...그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그게 '체력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들어가고 나오고 함으로 해서 뒤에서 대기하던 공격미들들이 일시에 빈 공간사이로 들어가고 다시 또 뒤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골 많이 챙겼습니다.
그 짓으로 한 것이 이원식, 김윤근의 연속골들이었고 그래서 이들에게 신경쓰면 이들이 빠져나가고 그 틈을 물러났던 윤정춘, 세르게이가 들어가면서 결정짓는 웨이브공세였죠. 그걸 맞춰서 지휘했던게 바로 윤정환입니다. 전 지금까지도 그 웨이빙 공격이 잘 될때의 모습을 K리그에서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무려 7명이 일렬 또는 2열로 웨이빙되면서 상대 맹폭할때의 모습은 아름다웠었습니다.
Sporting 2008/03/13 23:04 # 답글
잘 보았습니다. 윤정환은 저때부터 프리롤로서 경기를 소화했었군요.아, 늦었습니다만, 링크 신고하고 갑니다. ^^
홍차도둑 2008/03/14 16:16 # 답글
Sporting님...링크 감사합니다 ^^
nibs17 2008/03/15 00:45 # 답글
...헤르메스가 "부천FC"콜을 하면 반대편에서 "목동FC"라고 화답(?)하던 시절이 떠오르네요(먼산)
홍차도둑 2008/03/15 10:28 # 답글
nibs17님...흐흐...저도 그거에 엄청 반발하던 때가 많았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