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한세대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허정무는 무를 사랑하는게 아니었습니다

에 른밸님께서 저의 예상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의 주장은...
[이번 유럽2연전의 중심은 '지지 않는 경기'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피해를 보는 경기'를 맘대로 할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였습니다 ^^;;;

이 부분에 대한 차이를 조금 설명하자면...

지지않는 경기하고 '최소한의 피해를 보는 경기'하고는 좀 다릅니다. 최소한의 피해를 보는 것이란 경기 결과로 나오는 '최악의 경우라도 적은 점수차의 패배'일 뿐 아니라 세르비아전에서 보여준 '실점을 하더라도 우왕좌왕 무너지지 않고 빨리 정비해서 정상적인 경기를 치뤄가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 경기 중에도 반격의 기회가 생기지요.

이러한 부분은 1990년대의 월드컵을 보면 한탄스럽게 나옵니다.

특히 1994년 월드컵에서 독일과의 경기를 김호감독은 이렇게 자평했었습니다.
"흔들리는 팀을 빨리 추스렸다면 경기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골키퍼이자 주장인 선수를 교체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더 빨리 그 모험을 시도했어야 했다"라고 경기 직후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결과는 2-3
'따라는 갔지만...투혼은 있었지만 결국은 졌습니다.
전반 중반에 수비가 여지없이 무너진 그 부분에서 승부가 갈렸습니다.
그때 만약 이번 유럽2연전처럼 빠른 수습이 있었다면 경기 자체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게 고쳐지기까지 15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 15년...적은 세월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는 하나의 씨를 뿌린 사람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닌 필연. 그것은 바로 차범근이라는 한 영웅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그 이후 차범근 감독이 연 '어린이축구교실'이 연지 약 18년이 지난게 지금입니다.
그때 시작한 어린이들이 이제 20대 후반이고 더 정비가 된 환경에서 시스템의 도움을 받은 1세대가 바로 지금의 20대 중반과 초반의 선수들입니다.
이전에 언론에서 '희망적인 시나리오'를 열심히 설파했습니다.
'이러면 16강에 갈 수 있다!', '이렇게이렇게 해라!' 그러나 실전에서 가면 연습때 여러 강호(?)들을 상대로 보여준 한국팀의 여러 뛰어난 경기력은 본선에가면 사그러들었고 언론에서 말한 시나리오를 제대로 수행하는것은 '전후반 시작하자마자 약 15분 정도에 그쳤습니다' 아니 대놓고 1990년 월드컵의 첫번째 경기에선 대놓고 '우린 무승부로 가겠다'고 설쳐댔지만 나온 것은 전후반 통털어 70여차례가 넘는 패스미스에 의한 인터셉트...에 상대방에게 농락당하면서 끝나버렸죠.
(쓰벌 그 경기 지금도 생각하면 이빨 갈립니다. 중간고사 때 중간고사 말아먹을 각오하면서 그것도 고3이 말이죠...시험공부 한답시고 밤새면서 봐 댔는데 쓰벌, 아주 그냥 주눅들어서 완전 몸이 얼어붙은채로 말이죠...뭐하자는 건지...하는 생각으로 봤습니다. 당연히 시험은 죽쒔고 뜨벌...)

그런데 이젠 '실제로 할수 있는'선수들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들이 놀려대는 '이기지 못하지만 지지는 않는 근성무의 한국축구'로 보는 선수들입니다.
뭐 이전엔 이기면 화끈히 이겼을까요? 그러기에 이러한 무재배가 열받는 것일까요?
글쎄요...
전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한국은 의외로 약팀을 '캐 바른'예는 많지 않습니다. 이전 1968년 올림픽 진출을 놓고 일본과의 경쟁에서 탈락한 것은 득실차였습니다. '약체' 필리핀을 발라버리지 못한 것 때문에 동률인데 득실차에서 밀렸지요. 그리고 일본은 올림픽 동메달을 따버렸습니다.
(다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뉘앙스를 풍기더군요 '우리가 올라갔어도 그정도 성적은 냈을 것임!' 하고 말이죠...천만의 말씀입니다. 일본을 이기고 올라갔더라도 동메달 못땄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8강도 가기 버거웠겠지요. 이 부분은 언제 다른 예로 글 하나 쓰겠습니다.)

사실 한국이 아시아 최강자로서의 위치를 누린 것은 이전에도 짧았고 지금도 보건데 길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다만 아시아지역 권 내에서의 강팀들과는 수많은 명승부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건 부인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국을 '아시아의 강호'로 당당히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전의 선수들은 아시아권에선 어떨지 몰라도 세계무대로 가면 늘 그랬죠. 언제나 1회전 탈락이요 상대방의 1승 지목 타켓. 누구 말마따나 '승점 자판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옛날 PC통신 시절 축구동호회에선 두가지의 블랙유머가 있었습니다.

'월드컵 및 올림픽 때에 일어나는 일반화된 현상'
강팀을 만나서 본선진출->언제나 약체를 잡고 어떤팀은 비기고 어떤팀은 승부를 포기한다는 시나리오 언제나 1승1무또는 3무->이를 위한 수비력 보강 및 원샷원킬의 공격력 확보->평가전에서의 여러 승리에 기뻐 날뜀->정작 본선에선 저조->대회 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의 무한반복이라는 것.

그기로 경기에서의 '한국팀 월드컵에서의 패배의 공식'
초반 10분 무지 잘함(아 이거 뭔가 될거 같다)->15분쯤부터 오버페이스 또는 빈 틈에 말려서 골 헌납->이후 두갈래 길 상대가 그대로 흔들기만 하고 끝나던가. 아님 그 흔들림이 빈틈을 찾아 추가득점->25-30분이후 정신차린 한국이 약 10분간 신나게 밀어붙임->35분~40분경 역습 당해 골 헌납 또는 위기상황 자초->전반종료. 후반 15분까지 엄청 몰아붙임 이 경우 만회골을 터트리기도 함->20분 무렵 오버페이스및 빈틈 보여서 추가골 헌납->25-28분경부터 신나게 몰아붙임. 그러나 약 10분 정도->나머지 시간동안 상대방은 역습 몇번 하던가 아님 그냥잠그기로 경기 끝남.

거의 틀리지 않는 공식이었지요...알면서도 이렇게 할수 밖에 없는 것이 이전의 선배님들이었고 이게 한계였습니다.
몇몇 시대를 뛰어넘는 선수들 외에는 말이지요...
이 상황에서 최고의 시나리오는 어떻하던 선제골을 넣던가 한골만 실점 한 상황에서 밀어붙일 때 동점골 넣어서 쫒아간뒤 종료되는'무승부'외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러한 체질로 보낸게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의 한국축구입니다.

사실 전 감독으로서의 차범근 감독을 낮게 봅니다. 감독으로서 팀에 대한 여러 부분은 허정무 보다는 더 아래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을 놓고 평할 때. 이제는, 정확히는 2008년 이후부터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영웅' 이라고 감히 말합니다.(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지금도 좋지 않지만요 ^^)

차범근이라는 축구영웅의 업적중 가장 위대한 것은 분데스리가에서의 영웅적인 기록과 활약이 아닙니다. 감독으로서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던가 리그 우승이 아닙니다.
한국축구의 근본을 뿌리채 바꿔놓은 '차범근축구교실'
이것이 차범근의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차범근 감독이 선수시절, 그리고 1990년까지의 느꼈던 여러 점을 정말 개선코자 1980년대 초반부터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나 여러 경로로 알리고 했던 것이 '유소년 축구교실'이었습니다.

한자에서 세대를 일컫는 세(世) 자는 30의 변형이라 하더군요, 30년을 지나서 하나의 세대가 바뀐다는 것이죠.
그러나 가만히 있는다고 바뀌지는 않습니다. 차범근이라는 한국의 축구영웅은 정말 자기가 생각한 뒤 30년뒤의 꿈을 이뤄내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감독으로서는 더 나쁜 평을 차범근은 받을수 있습니다(반대로 좋은 평을 받는 명감독이 될수도 있죠).

그렇지만 차범근 축구교실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선수들이 길러졌습니다.
종목은 다르지만 제 주변에서 일어난 실제 예가 있습니다. 제 후배중 한명은 농구를 아주 잘합니다. 거의 선수 수준이었죠 장난 아니었습니다. 하이텔 농구동호회 초기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이텔 농구동호회에 우연히 인천 송도고등학교의 실제 농구 선수가 가입을 했기에 송도체육관에서 경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그 후배를 보고 송도고등학교 감독이 실제로 송도고등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었습니다. 네...송도고등학교...농구쪽의 명문이지요. 그런데 그 후배는 송도고에 안갔습니다. 선수들이 얼차려 받는거 보고 "왜 맞아가면서 좋아하는 농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면서 안가고 말았습니다. 이게 199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이게 바뀌어진게 바로 1990년대 초반부터의 축구였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걸 하다가 결국 이놈의 '얼차려'로 축구를 싫어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축구교실의 1세대급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 1990년대 중 후반 이후부터 프로팀들이 유소년 클럽들을 창설하고 그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들을 속속 만들어 댑니다. 전북의 경우 최만희 감독님이 계실 때 분데스리가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코치도 데려오고 그것도 모잘라 폐교 하나 인수해서 실제 '축구사관학교' 만들려고 했던 시도도 있었습니다.
당시 우연한 자리에서 최만희 감독님과 이야기를 했을 때 최만희 감독님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히사더군요.
이 선수들 중 재능있는 선수들을 정말 키우고 싶은데 시스템 만드는게 쉽지 않다면서 자기가 전북 감독으로 있을 때 정말 꼭 정착시키고 싶은 것 중 하나가 그 폐교를 잘 이용해서 어린 선수들 키우는 시스템 만드는 것이라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이게 발전해서 지금 전북의 팜 시스템이 되었는지는 아쉽게도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1990년대 중 후반에 이러한 시스템이 갖춰진 곳에 들어간 축구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이제 19세 이상의 대표팀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어린 선수들도 경기력만 따지자면 이미 성인 대표팀 수준을 능가할 정도의 약삭빠른 플레이들이 나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은 현재 바둑에서는 세계 최강국이라 부릅니다. 이 시발점은 보통 1988년 시작된 응창기배에서의 조훈현 9단의 우승부터라고 합니다. 이후 서봉수 이창호 등의 기사들이 우승했고 특히 이창호의 경우는 뭐 국제기전 싹쓸이를 하는 등 난리가 났죠.
바로 이 이창호가 한국 바둑사관학교의 1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훈현 9단의 직속제자였지요. 이후 여러 '내제자' 내지는 '바둑도장'이 생깁니다. 여기서 나온 기사들이 바로 한국바둑의 중추를 이뤄내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경우 쇼와 시절의 두 명인인 세고에 겐사쿠(조훈현 9단의 스승입니다)와 기타니 미노루(조치훈9단이 이 문하생군단[네 정말로 군단급입니다. 문하생들 다 모으면 그들의 단수가 200단은 넘어갈만한...] 막내뻘이지요) 두 사람이 만들어 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그 둘의 문하생들이 이후 몇십년간을 쓸어버리다시피 했죠.

그리고 한국바둑이 정상급에 올라간 것은 당시 최정상을 차지한 조훈현이라는 거목이 분전한 이후 그 무렵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여러 프로들이 영재들을 키워낸 '바둑도장'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때 이창호를 필두로 한 어린 후학들의 바둑을 보고 선배들은 경악해 버렸습니다.

"아니 무슨 10대가...어린 바둑이 아닌 60대의 원숙한 바둑을 둔단 말인가?"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젊다고 패기있게 나가고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한두차례의 펀치교환이 끝나고 크게 싸움 안벌여도 되겠다 싶으면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스타일. 형태에 구애받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치열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더 지독한 치열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전에 자신들이 한 10년 20년을 쌓아야만 할수 있었던 여러 가지들이 이미 10대들이 능수능란하게 구사합니다. 더불어 더 깊은 수읽기, 그리고 연구욕심...이미 이전에 일가를 이루고 도전자 또는 몇개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몇년전의 거장들'은  이미 상대가 안되기 시작하고 최전선에서 하나둘씩 철수해야 했습니다. 과거의 명성만을 남긴 채 그들의 선전은 지금은 화제가 되지만 정상을 다투기엔 이미 경쟁전선에서 탈락해 버린 상황인 겁니다.

자...위의 몇몇 말이 축구와 일치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청소년들이 여러 대회에서 보여준 원숙한 몸놀림은 바둑의 그것과 흡사합니다. 그걸 약 10년뒤에 그대로 카피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그러고보니 딱 10년의 차이로군요.
이창호가 첫 타이틀을 따낸 것이 아마 1986년 경으로 기억합니다. 그 무렵해서 조훈현9단의 문하로 들어갔고 몇몇 프로기사들의 도장들이 그때쯤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시스템이 딱 10년 차이네요.

그리고 그 10년 차이를 가지고 이제 축구에서는 세계 정상권까지는 무리더라도 강호권에의 노크를 시작했습니다. 네 별거 아니었죠, '유소년 교육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와 만들어져서 돌아가기 시작할때의 차이가 이렇더랍니다.

이 차이를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데 걸린 시간이...
30년이네요.
어째 운이 좋게 딱 그 세대에 태어나서 그걸 지켜보고 자라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30년이라는 것,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이렇게 발전할수 있구나 라는 것을 볼수 있었고 관련된 많은 분들과 직접 이야기 할수 있었다는 것을 정말 '값진 30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월드컵과 다음번 월드컵은 그 30년의 증명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주 즐거울 겁니다. 축구는 짧게는 그 경기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이렇게 길게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지금 나는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축구를 좋아하기를 잘했나 봅니다 ^^

by 홍차도둑 | 2009/11/20 07:49 | 축구이야기 | 트랙백 | 덧글(19)
무패 기록은 끝났지만...
허정무 감독으로서도 그러한 무패기록에 대한 부담은 컸을 것이다.
그런 것이 일단락 됨으로 해서 하나의 부담을 던 것에 대해선 허감독으로선 확실한 수확이었을 듯 싶다.

경기 자체야 논할 부분이 별로 없다.
전반 선취점을 내준 이후 박빙으로 경기를 이끌었다는 부분외에는 말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양팀은 주전들이 몇몇 빠진 상태라 최상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도 있겠지만 사실 본선에서도 언제나 100% 컨디션 맞춘다는 보장이 없다.
사실 팀의 경기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베스트 상태'가 아니라 '뭔가 실타래가 엉키고, 주전이 빠졌을 때. 그 팀이 어떻게 경기를 운영해서 승리를 만들거나, 아니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이다.
이것이 전체론이고 어디가 이랬네, 어느 선수의 대채를 찾았네 하는 것은 각론에 불과하다.
(니폼니쉬 감독과의 대화에서 니폼니쉬 감독은 이 부분을 '리그에서는 버리는 경기도 나올수 있다. 그러나 내용이 버리는 경기가 되서는 안된다. 그 경기에서도 내일에 대한 비전을 감독은 찾아내야 하고 선수들에게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 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다.)

이번 경기들은 바로 그러한 총론을 보아야 하는 경기둘인데 나의 생각은
'평균점 이상은 한 경기'라 보고 싶다.

사실 덴마크전에서도 여러 위기상황을 잘 넘겨서 0-0이 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경기를 세르비아전에 대입한다면...
바로 결승골을 허용한 지점만 잘 넘겼다면 0-0이 될수도 있었다는 예상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건 희망사항이 아니라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다.

이번 경기에서 감탄한 부분은 상대가 미들에서 약간의 실수를 했을 때 그 공들을 유유히 커팅해서 역습으로 연결하는 장면들이었다. 문제는 공격진의 날카로움이 떨어져서(이동국의 가장 큰 문제는 트래핑이 잘 될때와 안될때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거다...) 골로 연결하지 못했다. 이 부분이 아니었다면 승패는 알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김남일-조원희 조합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 사실 이 둘을 동시에 세울 땐 둘 다 수비만 보려고 하는 상황이어야 한다. 김남일과 조원희가 사실 공격성향이 있다 하더라도 공격력 자체가 아주 뛰어난 선수라 보기는 어렵다(조원희의 윙백 시절과는 비교를 말아주셨음 한다. 윙백으로의 공격성향및 실력과 중앙 미들로 옮겼을때의 공격성향및 실력은 분명 다르다. 야구에서도 유격수 보던 선수가 3루나 2루로 보직변경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성공하는 케이스가 적은게 비슷한 예다. 포지션별로도 플레이 스타일 및 다른 선수들과의 조합에 따라 이 부분은 달라지는 엄청난 변수를 가지고 있는 다차원방정식이다. 이건 단체구기 모두에 적용된다.)

그러나 하나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놈의 신종 플루 때문인지 '백신주사 확실히 맞았다' 운운하는데...
(솔직히 김연아 선수의 이번 부진에서도 '본선 예방 백신주사' 운운하는데...글쎄올시다다)
그런데 덴마크-세르비아와의 2연전을 통해 '백신'급의 주사를 맞은 것이라 봐야 하는가?
라면...'글쎄올시다...' 라고 하겠다.

단 이 전제조건이 붙는다면 '백신주사가 맞긴 하지' 라고 하겠다.
B형 간염처럼 한 2-3차례 맞는 주사의 첫번째 주사라면...왜냐면 늘상 이런 팀들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백신주사를 맞아서 본무대에선 잘할것'이라는 것은 허상이다. 백신주사를 맞았다고 해서 그 질병에 걸리지 않는 일반적인 '예방의학'과 단순 대입은 어렵다. 그리고 '백신주사'맞았다고 건강에 해로운채로 다니면 해당 백신으로 막을수 있는 병은 안걸릴지 몰라도 다른병 걸린다. '백신주사'는 만능이 아니다.
실제 경기에서는 여러 변수가 있고 이건 수치화할수 없는 부분인지라 '어느 과정에서의 어떤 실수'와 '백신주사'와는 분명 다른것인데 계속 '백신주사' 운운하는걸 보니 그놈의 플루가 유행은 유행인가보다.

이번 2연전을 통해 확인한 부분은 분명 있다.
수비의 부분에선 1990년대의 우왕좌왕함은 이미 없다.
이번 유럽2연전의 중심은 '지지 않는 경기'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피해를 보는 경기'를 맘대로 할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한국의 월드컵, 올림픽의 여러 본선 경기들중 아쉬운 몇 경기는 '패배시의 실점 하나로 2위 다툼에서 떨어진 것'들이었다.
우세한 경기에서 한골만 더 넣었다면, 이라는 아쉬움 만큼이나 질때 한골만 덜 실점했다면. 이라는 가정사항 말이다.
라운드 로빈 방식에서는 1라운드를 리그전으로 치루고 최소 3경기를 치루는 것이 이제는 거의 관례다. 이 때 첫경기에서 대패를 당한 것이 나중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됨을 최소화시키려면 '질때엔 상처를 덜 입어야 한다' 는 것이다.
요게 리그제라던가 장기레이스에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다. 1990년대 이전 한국이 유럽팀과의 경기에서의 문제점이 바로 이러한 '흔들림'을 당할 때 상대에게 휘말리는 시간이 길게 되면 여지없이 대패로 몰려가는 것이 이런 부분이었다.

이번 경기에서 중요한 점은 선제골을 허용한 뒤 재정비 시간이 빨랐다는 것, 그리고 후반전에는 다른 경기를 보일 정도로 팀 정비를 한 것. 이것이 바로 허정무 감독의 능력이라는거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오오 무재배가 끝났네' '무패행진이 끝났네' 라는 단순 비판만으로 이번 경기를 마무리 해서는 안된다.

분명 본선에서 한국이 2승급으로 2라운드 진출하는 것은 버겁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 경우 변수를 많이 만들어 내기 위해선 '7무 우승의 시나리오'라는 농담은 무시할수가 없는 부분이다.
변수를 많이 만들어 내기 위해선 강팀과의 경기에서 무승부 내지는 적은점수차 패배라는 것은 나도 벌써 20년 넘게 들은 구닥다리 레파토리 되겠지만...근데 우짜냐...그게 현실인걸...

이번 경기들의 포인트는 이거다.
'베스트 팀을 만들지 못했을 때 경기를 어떻게 풀어가는가?'

이 부분은 일정 수준점을 넘어섰다는 것이 이번 2연전의 총평이다.
어디가 부족하고 다듬고 그건 어떤 경기던간에 나오는 이야기다. 분명한 것은 한국은 이제 1990년대의 그 때와는 완전 다른 팀이고 강팀으로의 계단을 분명 몇걸음씩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 쓰고 나서 덧글 하나
유럽이나 남미의 스카우터들이 선수 평가하는 주요 자료중 하나는 '그 선수가 얼마나 잘났느냐' 보다는 '컨디션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팀을 위해서 움직임을 보이느냐(또는 완벽하게 그 선수의 장점이 틀어막혔을 때에도)가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때로는 이게 '그 선수가 얼마나 잘났는냐' 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 아 이 말 빼먹었다.
20년전의 그 레퍼토리와 지금이 다른것은 그때도 '강팀은 지더라도 최소한, 어떤팀과는 비기고, 어떤팀은 무조건 잡자'라는 '시나리오'를 언론이 써 주었지만 그때의 결과는 팀은 '그대로 하려고 했지만 하지는 못하고(할줄도 모르고)' 언제나 '강호와의 차이를 느꼈다' 였다.
그러나 지금은 '선수와 감독이 알아서 어느정도는 해낸다. 최소한 주눅들고 내빼지는 않는다' 의 차이다.
by 홍차도둑 | 2009/11/19 11:18 | 축구이야기 | 트랙백 | 덧글(9)
자료가 부족해, 자료가 부족해...

시골 헌집의 역사적 가치

제가 14년전 쯤 한국축구자료 정리를 시작할 때 비슷한 이유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과연 한국의 첫 A매치는 무엇일까?
를 놓고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축구협회.
당시 아는 직원(이분 요즘 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모 축구 에이전트 사무실에서 일하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못뵈었으니까요. 하이텔 축구동을 축구협회에 처음 소개해 주고 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이 국제실을 뒤져서 찾아온 것은 겨우 A4용지 한장.
거기에 볼펜으로 적혀있던 몇줄.

1948 런던 올림픽
대한민국 5-3 멕시코


어이없기도 했고 눈물나는 한줄이었습니다.
그때가 이미 전 한국바둑사학의 개척자 권경언 선생님(경향일보 바둑 해설을 하신 분입니다. 요즘 이분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이 월간바둑을 통해 '한국바둑의 뿌리가 없다. 1회 대회가 언제 어떻게 치뤄졌는지에 대한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다'라면서 한탄하셨던 글을 보아버렸던지라...그냥 헤까닥 해 버렸습니다.

원래 이 일은 소설가 고원정 선생님이 MBC의 축구 다큐멘타리의 대본을 쓰시기 위해 여러 축구 자료를 모으시던 일로 시작되었었습니다. 집필하시느라 바빠서 절 스크립터로 고용하신 것이지요.
(참고로 고원정 선생님도 상당한 축구광이십니다. 많이 드러나지 않은 것 뿐이지요. 김흥국씨의 엄청난 과는 이런 묵묵히 축구를 좋아하고 그것도 열성적인 분들이 앞에 나올수 없게끔 너무 오두방정을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걸음부터 헤까닥 돌아버렸습니다. 그 뒤에 적혀있는 것의 많은 부분이 볼펜으로 쓴 것. 그나마 나중에 가니 워드 아래한글의 1.5버전(아아 추억의 그 버전)들로 나온게 다...
한숨이 푸욱 푸욱 나왔습니다.

그런데 더 가관인게...
날짜 안맞는 것도 발견...한숨 쉬었습니다.
당시 서초동의 국립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저 혼자도 힘들어서 스크립터로 축구동아리의 아는 선배도 같이 갔습니다.
둘이 상의를 했지요.
'대한축구협회에서 본 자료의 날짜를 중심으로 하되 앞뒤로 3일씩 다 흩어본다!'
그 결과 마이크로필름실에서는 저와 그 선배가 완전 단골 다 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 끝은 아니었지요. 마이크로 필름으로 찾은 부분...그걸 또 출력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건 또 당시 국립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실에는 출력하는 것이 한대밖에 없었습니다. 에효~ 시간은 배로 걸렸지요.
이런 삽질은 1968년 중반의 신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나마 이때 일간스포츠가 나오면서 스포츠만 전문적으로 다루니 날짜 오차가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삽질의 두달...

물론 그 이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경향신문이라는 몇몇 신문을 중심으로 뒤져야 했습니다.
그 결과 볼펜 한줄의 뒤에는 '몇시 어느 경기장' 이라는 것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큐멘타리에서는 런던 교외의 '덜리치 햄릿 경기장'(동아일보의 원문 기사에서는 다른 표기였습니다. 그래서 거기 알아내느라 MBC 취재진이 현지 취재 한 것으로 압니다)에서의 장면으로 시작했고 제가 쓴 '슈팅'이라는 만화에서 잉글랜드에서 열리는 청소년 대표팀이 방문하는 에피소드를 넣은 것이 그 경기장을 문헌으로라도 찾아낸 기쁨을 잊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결국 그 다큐멘타리는 끝났지만...한숨이 나왔습니다.
단 둘만이서 두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의 그러한 편린을 모은 것...
얼마 안되었지만 많은 빈자리가 남아있는 퍼즐에서 겨우 몇조각을 맞춘 것만으로는 힘들었었습니다.

거기에 동조를 해 준 것이 윤형진군이었습니다.
1995년쯤 시작된 이 행진은 길었습니다. 결국 2005년쯤 되서야 간신히 첫 단추를 꿰었습니다. 10년정도 걸려서 간신히 첫 발자욱을...하지만 부분부분 해야 할 것은 많았습니다.

협회 DB를 손보는 일이 맡아졌습니다.
1960-1970년대의 전술까지 챙겨가면서 선수들의 포지션 분류까지 해야 하는 작업의 적임자라 하여 그걸 통으로 맡아서 해야 했습니다. 결국은 다시 또 도서관으로 가게 되더군요. 헐값에 일한 면은 있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그런 문서들과 씨름하고 한글자 발견하는 걸 지금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끙끙대면서 해야 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증언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로
(그 당시 개념을 지금 현대의 개념과 일치시키기는 어렵습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인너'라는 포지션이 분명 개념상 있었습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인너'포지션을 팀의 주공격 루트로 사용한 팀도 있었습니다. 현재 하는 용어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놓으면 편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이게 또 아니라서 더 힘든 문제였지요...핸드볼 하는 분들이 아는 '인너' 라는 포지션과 축구의 '인너'포지션이 같은 포지션입니다. 핸드볼의 한 갈래는 축구쪽에서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까지 감안하면서 하느라 하루에도 몇차례 머리가 빙빙 돌았었지요...결국은 완벽하게 맞추지 못하고 경기당 퍼즐 맞추기를 많이 해야했습니다. 사실 당시 폼이션이나 전술 등을 고려하지 않은 '폼 제작자'에 대해서 투덜도 많이 댔어요.
(CM4의 데이터 에디터 일을 했을 때에도 이런 일 많았습니다)

그동안 윤형진군이 큰 역할을 해 줬습니다. 자비를 들이기도 하고 협회의 도움을(국제부의 송기룡 부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받아 아시아 여러 나라의 도서관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경기 기록뿐 아니라 선수 로스터 등을 확보한 부분이 생겼습니다. 퍼즐이 점점 맞춰지고 슬슬 그 퍼즐이 모인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이 '붉은악마 그 60년의 기록'이었습니다.
출판문제를 놓고 결국 공동출판이 되었지만 사실상 그 기록은 윤형진군의 금자탑입니다.
첫 시작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을 지 몰라도 정말 '우공이산'급의 일을 해 내준거지요. 난 그래서 윤형진군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말 아쉬운 것이 옛 축구자료의 발굴이었습니다.
슈타인호프님같은 아니 그러한 예시해준 만큼의 운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윤형진군도 아시아 곳곳의 도서관을 돌아다니는데 때로는 좋은 운을 만났고, 때로는 그렇지 못해서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떠야 했던 적도 많답니다.

아직 그 이야기의 빈 자리는 많습니다.
저와 윤형진군은 지금도 구 소련에서의 양대 스타중 하나인 올레흐 블로힌으로부터 '나의 후계자'라는 찬사를 받은 미하일 안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소련 축구의 1세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중앙아시아의 까레이스키들의 축구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습니다.
타슈켄트나 알마타 등지의 도서관에서 까레이스키 축구선수들의 활약이 담긴 한줄의 기사가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그 글을 좀 늦게 읽었습니다.
그 몇줄 몇장의 세월의 편린에 내가 찾고 싶은 자료가 있었는데 없어졌다면...갑갑하지요 대체할 자료를 찾을수 없는 상황에선 한숨만 나올뿐이니까요.

언젠가 중앙아시아로 가서 거기 도서관을 섭렵하고 다닐 날이 올까요?
새벽에 집에 돌아가면서 열심히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나 들어야겠습니다.

아직도 윤형진군과 저의 그러한 정리작업은 계속됩니다. '붉은악마 그 60년의 기록'은 종착점이 절대로 아닙니다. 일단 급한 마음에 이정표 하나를 살짝 박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by 홍차도둑 | 2009/11/17 04:56 | 축구이야기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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